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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러 같이 읽어?

공부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을 한 번 들으면 대체로 잘 이해하는 편이었고 기억력도 나쁘지 않았기에 전교 1등은 아니어도 학급에선 초중고 내내 상위 그룹에 속해 있었다. 전기도 없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골 할머니 댁에서 일곱 살까지 지냈는데 한글을 일찍 익힌 바람에 고모들과 삼촌이 읽던 몇 안 되는 책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집성촌이었던 시골 할머님 댁 근처엔 아이라곤 나 혼자뿐이었고 대부분 노인들이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일을 나가시면 혼자 집에 있기가 심심하여 같이 따라가 밭둑에 앉아 책을 읽거나 땅바닥에 그림이나 글씨를 쓰면서 놀았다. 게다가 늘 어른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쓰는 단어들은 아이의 언어가 아니라 시골 어르신들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이어서 소위 말하는 애늙은이가 바..

창작밭/산 문 2023.09.30

소설가 김훈의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읽고

소설가 김훈의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읽고 8개월간 시아버님의 유언을, 유언 비슷한 말씀을 기다렸는데 그 누구에게도 한 말씀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저 고생했다 수고했다 건강히 살아라 화목히 지내라 차조심해라 열심히 일해라 좋은 친구를 가져라 아껴써라 밥 잘 먹어라 등등 일상의 덕담들이 무수한데 이런 사소한 당부조차 하지 않으셨다. 의도적이 아닌 일상언어로 긍정적이고 사랑이 담긴 말을 했는데 그게 망자와의 마지막 대화였으면 그것이 사랑이 담긴 긍정적 유언이 되는 것이니 되도록 그런 말들을 언제나 어느 때나 수시로 하는게 맞다 싶다. 언제 소멸할 지 모르는게 생명의 속성이니까.... 시아버님을 하늘로 보내 드린지 며칠이 지나도록 식사를 못할만큼 왜이리 명치 끝이 답답하고 마음이 안풀리나 들여다봤더니 결국..

창작밭/산 문 2023.08.04

철쭉

손성란 바람 흙 햇볕 비를 버무려 분홍이다가 빨갛게 붉어졌다가 이내 하얗게 창백해 진 얼굴을 변덕스런 봄길에 온통 맡겨버린 너 태양처럼 뜨겁거나 웨딩레이스처럼 순결하거나 소녀처럼 연하게 수줍은 너의 모습에 취해 가던 길 멈추고 자주 허리를 굽혀 네 곁에 머물다가 문득 하늘이 하는 일을 생각했지 네 얼굴에 박힌 작은 점 하나도 나는 흉내낼 수 없구나 하는 바람이 내준 길을 따라 태양이 내준 빛을 따라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조용히 와서 뜨겁게 피었다가 불평없이 가버리는 네 곁에서 나는 사람이 하는 일도 생각했어 아주 작은 노력만으로도 향기도 색도 모양도 크기도 크고 화려하고 진하면서 아주 오래오래 기억되며 빛나길 바라던 내 일들이 모래와 검불로만 쌓아도 결코 무너지지 않기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내 향기는..

창작밭/시 2023.08.03

너는 손성란

아이야, 마음에 불이 꺼져 캄캄할 때 너무 겁내지 마 그냥 잠깐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가만히 서 있자 바람이 멈출 때 바람이 불어왔던 곳에 눈을 맞추고 햇빛이 스러질 때 바다로 돌아가는 태양을 보자 이제 너를 감싸주려 혼자 나온 달빛에 온몸을 맡기고 가슴을 열어 우주의 어머니를 불러 봐 작은 소리로도 괜찮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침, 봄, 새싹, 바람, 별 그렇게 힘이 솟는 낱말들을 하나씩 입 밖으로 내어 놓아 봐 빈 마음이 채워져 반짝 불이 켜지면 어깨를 흔들어 등을 가볍게 하고 두려움 꺼내어 후우 힘껏 날려 버려 겨울 없이 오는 봄, 밤 없이 밝아오는 새벽 따뜻하지도 환하지도 않아 지금은 그냥 한 겨울의 밤이 지나고 있을 뿐이야 다시 기억을 꺼내 줘 넌 밤보다 깊고 별보다 단단한 우주의 어머니..

카테고리 없음 2023.08.03

햇살 먹이

햇살 먹이 손성란 할머니가 아기를 유모차에 싣고 걸어갑니다. 겨울을 품어낸 봄 새싹처럼 할머니의 세월은 연두 빛 햇살로 가만가만 조심스레 아기에게 스며듭니다. 겨울과 봄이 만나 인사를 하는 사이 햇살 먹은 아기는 쑥쑥 자랍니다. 어느새 아기의 유모차는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쥐고 돌돌돌 노래하며 걸어갑니다. 2022년 학산문학 봄호에 출품

창작밭/동 시 2022.04.09

꽃들은 올해도

꽃들은 올해도 손성란 꽃들은 올해도 마스크를 하지 않았어요 꽃들은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또 올해도 역시나 마스크를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마스크를 눈밑까지 올리든 말든 꽃들은 목젖까지 덜컥 열어 놓고 온 얼굴을 내어 놓았어요 햇볕에 익어 온몸이 붉어져도 벌 나비 올 때까지 바람에 춤까지 추네요 작고 여리고 얇고 약하지만 피어있는 날들만큼은 아무 것으로도 가리지 않고 다 보여주고 싶은가 봐요 나도 꽃들처럼 사는 동안 가림없이 거짓없이 용감해지고 싶어요 2022.4.9.토. 붉은 산당화를 보고 (작년보다 2주정도 늦게 핌)

창작밭/동 시 2022.04.09

비에 관한 예쁜 우리말

가루비 - 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 잔 비 - 가늘고 잘게 내리는 비. 실 비 - 실처럼 가늘게, 길게 금을 그으며 내리는 비. 싸락비 - 싸래기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 날 비 - 놋날(돗자리를 칠 때 날실로 쓰는 노끈)처럼 가늘게 비끼며 내리는 비발 비 - 빗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비. 작달비 - 굵고 세차게 퍼붓는 비. 달구비 - 달구(땅을 다지는 데 쓰이는 쇳덩이나 둥근 나무 토막)로 짓누르듯 거세게 내리는 비. 여우비 - 맑은 날에 잠깐 뿌리는 비. 먼지잼 - 먼지나 잠재울 정도로 아주 조금 내리는 비. 개부심 - 장마로 홍수가 진 후에 한동안 멎었다가 다시 내려, 진흙을 씻어 내는 비. 바람비 - 바람이 불면서 내리는 비. 도둑비 - 예기치 않게 밤에 몰래 살짝 내린 비. 누 리 - ..

100가지 꽃과 꽃말

갈대 : 신의, 믿음, 지혜 개나리 : 희망 개다래나무 : 꿈꾸는 심정 개양귀비 : 위안,약한 사랑 갯버들 : 친절 거어베라 : 신비,풀을 수 없는 수수께끼 국화 : 청결,청순,정조 (백색) 성실,진실 (황색) 실망 (적색)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군자란 : 고귀 귤나무 : 친애 그로키니시아 : 욕망,야심 글라디올러스 : 밀회,조심 글록시니아 : 미태(媚態) 금연화 : 애국심,변덕 (황색) 당신은 인격자입니다. (적색) 당신은 인정이 없습니다. (황갈색) 당신은 매우 이기적입니다. 금잔화 : 이별의 슬픔 꼭두서니 : 미태 꽃창포 : 좋은 기별, 우아한 마음 꽈리 : 거짓, 속임수 나팔꽃 : 덧없는 사랑, 기쁨 난초 : 청초한 아름다움 냉이 : 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너도밤나무 : 번영 네모필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