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밭 319

누가 더 행복한가?

처음부터 웃는 사람하고 마지막에 웃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크게 기쁨을 느낄까요? 정답부터 말하면 처음부터 웃는 사람이 더 오래 기쁨을 누립니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 동안 기쁨을 누릴 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기준은 아마도 기쁨을 지속적으로 접하는 걸 텐데, 항상 그러기는 어렵습니다. 맨날 좋은 일만 생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럼에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기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유가 있더라고요. 인생이 꿀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고난이나 역경도 과장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요소까지 그냥 받아들입니다. 인생의 조각(부분)에 연연하는 게 아니라 큰 그림(전체)을 그리고 거기에서 넉넉함..

창작밭/산 문 2023.10.23

홍시

홍시 손성란 뜨거운 햇볕 한 줌 개구쟁이 콧김으로 꽁꽁 묶어 꽁꽁 동여 담장 위에 숨겨 놓고 그만 잊어버린 거야 배부른 참새가 모른 척 하고 허수아비는 잠 안자고 밤새 지키고 꼬부랑 할머니 허리 필 때 주름진 얼굴에 물들던 젖먹던 힘이 아무도 몰래 담장 위에 빨갛게 빨갛게 고였던 거야 여름의 뜨거움 개구쟁이 콧김 잠 못 잔 허수아비의 빨간 눈 할머니의 지팡이에 대롱대롱 가을바람 조물조물 뭉쳐진 거야 동글동글 매달린 거야 작은 해처럼

창작밭/동 시 2023.10.13

뭐 하러 같이 읽어?

공부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을 한 번 들으면 대체로 잘 이해하는 편이었고 기억력도 나쁘지 않았기에 전교 1등은 아니어도 학급에선 초중고 내내 상위 그룹에 속해 있었다. 전기도 없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골 할머니 댁에서 일곱 살까지 지냈는데 한글을 일찍 익힌 바람에 고모들과 삼촌이 읽던 몇 안 되는 책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집성촌이었던 시골 할머님 댁 근처엔 아이라곤 나 혼자뿐이었고 대부분 노인들이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일을 나가시면 혼자 집에 있기가 심심하여 같이 따라가 밭둑에 앉아 책을 읽거나 땅바닥에 그림이나 글씨를 쓰면서 놀았다. 게다가 늘 어른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쓰는 단어들은 아이의 언어가 아니라 시골 어르신들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이어서 소위 말하는 애늙은이가 바..

창작밭/산 문 2023.09.30

소설가 김훈의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읽고

소설가 김훈의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읽고 8개월간 시아버님의 유언을, 유언 비슷한 말씀을 기다렸는데 그 누구에게도 한 말씀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저 고생했다 수고했다 건강히 살아라 화목히 지내라 차조심해라 열심히 일해라 좋은 친구를 가져라 아껴써라 밥 잘 먹어라 등등 일상의 덕담들이 무수한데 이런 사소한 당부조차 하지 않으셨다. 의도적이 아닌 일상언어로 긍정적이고 사랑이 담긴 말을 했는데 그게 망자와의 마지막 대화였으면 그것이 사랑이 담긴 긍정적 유언이 되는 것이니 되도록 그런 말들을 언제나 어느 때나 수시로 하는게 맞다 싶다. 언제 소멸할 지 모르는게 생명의 속성이니까.... 시아버님을 하늘로 보내 드린지 며칠이 지나도록 식사를 못할만큼 왜이리 명치 끝이 답답하고 마음이 안풀리나 들여다봤더니 결국..

창작밭/산 문 2023.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