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밭/동 시 171

홍시

홍시 손성란 뜨거운 햇볕 한 줌 개구쟁이 콧김으로 꽁꽁 묶어 꽁꽁 동여 담장 위에 숨겨 놓고 그만 잊어버린 거야 배부른 참새가 모른 척 하고 허수아비는 잠 안자고 밤새 지키고 꼬부랑 할머니 허리 필 때 주름진 얼굴에 물들던 젖먹던 힘이 아무도 몰래 담장 위에 빨갛게 빨갛게 고였던 거야 여름의 뜨거움 개구쟁이 콧김 잠 못 잔 허수아비의 빨간 눈 할머니의 지팡이에 대롱대롱 가을바람 조물조물 뭉쳐진 거야 동글동글 매달린 거야 작은 해처럼

창작밭/동 시 2023.10.13

햇살 먹이

햇살 먹이 손성란 할머니가 아기를 유모차에 싣고 걸어갑니다. 겨울을 품어낸 봄 새싹처럼 할머니의 세월은 연두 빛 햇살로 가만가만 조심스레 아기에게 스며듭니다. 겨울과 봄이 만나 인사를 하는 사이 햇살 먹은 아기는 쑥쑥 자랍니다. 어느새 아기의 유모차는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쥐고 돌돌돌 노래하며 걸어갑니다. 2022년 학산문학 봄호에 출품

창작밭/동 시 2022.04.09

꽃들은 올해도

꽃들은 올해도 손성란 꽃들은 올해도 마스크를 하지 않았어요 꽃들은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또 올해도 역시나 마스크를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마스크를 눈밑까지 올리든 말든 꽃들은 목젖까지 덜컥 열어 놓고 온 얼굴을 내어 놓았어요 햇볕에 익어 온몸이 붉어져도 벌 나비 올 때까지 바람에 춤까지 추네요 작고 여리고 얇고 약하지만 피어있는 날들만큼은 아무 것으로도 가리지 않고 다 보여주고 싶은가 봐요 나도 꽃들처럼 사는 동안 가림없이 거짓없이 용감해지고 싶어요 2022.4.9.토. 붉은 산당화를 보고 (작년보다 2주정도 늦게 핌)

창작밭/동 시 2022.04.09

코로나 장마

코로나 장마 손성란 우산도 우비도 없이 나선 길에 우르르 쾅쾅 번개 치며 갑자기 쏟아진 코로나 소나기 에볼라, 사스, 메르스 소나기처럼 금방 지나가겠지 기다렸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그리고 다시 가을 일곱 번의 계절이 지나가도 여전히 쏟아지는 길고 긴 코로나 장마 우리들은 코와 입을 가린 채 함께 모여 밥을 먹거나 노래하지 않네.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숨을 내쉬는 게 비밀이 된 세상을 옛날로 되돌리려면 백신 무지개가 떠야 한다네. 치료의 태양이 솟아야 한다네. 목젖을 드러내고 깔깔 웃으며 수백 개의 눈, 코, 입을 바라보며 노래하고 춤추던 그날 바로 그날로 돌아가고 싶네. 숨차게 뛰어서 아주 빨리 그날로, 바로 그날로 돌아가고 싶네. 2021.9.1.(2020.1.20 이후 코로나 ..

창작밭/동 시 2021.09.30

연수역 벚꽃로(어른을 위한 동시)

연수역 벚꽃로 손성란 긴 강처럼 찻길 따라 한복판에 피어난 사랑의 꽃길 여의도 벚꽃축제 가지 않아도 강원도 깊은 산 찾지 않아도 입던 옷 그대로 집을 나서면 언제나 그곳에서 반겨주는 산책길 폭신한 흙길 시원한 바람 초록나무와 꽃들의 향기 사이에 할아버지, 아빠의 운동기구 할머니, 엄마의 그늘쉼터 나랑 내동생의 작은 놀이터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사람들 숨길 꽃 숨, 이야기 숨, 휴식의 숨 쌓였던 걱정 큰 숨으로 내려놓고 밝고 건강한 숨으로 채워주는 길 나무들이 내준 길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연수동에서 청학동으로 벚꽃로 정기 채우고 연수역에서 서울 한복판으로 달려가는 수인분당선 꽃무릇 붉디붉은 가을 벚꽃로 가쁜 숨 내쉬러 다시 오는 길 2021년 6월 인천문협

창작밭/동 시 2021.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