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동시집을 묶는 어린이 시인 여러분, 축하합니다!
아직 쌀쌀한 겨울의 한기가 새 학년 새 교실로 들어서는 여러분들의 어깨를 자꾸만 움츠러들게 했던 3월 첫날의 모습이 영화의 첫 장면처럼 선명합니다. 오직 5학년 5반 이라는 이유만으로 일 년 간 함께 생활해야 하는 운명공동체로 엮어진 역사적인 날이었으니까요. 여러 친구들이 친구들과 선생님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올해 처음 연화초등학교로 전근을 온 선생님도 선생님의 선택이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여러분들과 한 묶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생각이었을까요? 어떤 이의 힘이 작용하여 여러분들과 선생님이 만날 수 있도록 한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요? 사실은 선생님도 여러분들처럼 곰곰이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을 한 단계 더 놓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지금까지도 여러분들과 선생님이 하나로 묶인 이 운명적 만남의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처럼 답답하지만 한편으로는 신비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다가 옷깃만 서로 부딪쳐도 인연이라는데 일 년 내내 하루에 7시간 이상을 함께 공부하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먹고, 함께 놀면서 때론 싸움도 하고 울기도 하고 깔깔 거리기도 하면서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이 인연은 수천 만 분의 일의 경쟁을 뚫고 맺어진 기적적인 일이겠지요?
이렇게 특별하고 소중한 인연으로 맺어진 우리들이 함께 해온 시간들을 고스란히 잡아둘 순 없겠지만 그 어는 한 순간이라도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은 선생님이 된지 서른 해가 지나도 줄어들 질 않으니 고십 센 욕심쟁이죠?
여러분들이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다 알면서도 자꾸 욕심을 부리게 되는 건 아마도 여러분들이 지나고 있는 초등학교 시절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짓 없이 진실한 시기인지, 우리가 사는 동안 이 때보다 더 정직하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구김없이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시기가 없다는 것을 한 해, 또 한 해가 더 해 갈 때마다 더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선생님의 욕심이 때로는 여러분들을 힘들게도 하고 지치게도 했다는 것, 모르는 척 했지만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지만 정작 그 실체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시간을 잡아 하얀 백지 위에 가두는 일이 사실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늘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서 솜사탕 먹듯 입에 넣고 혀로 녹이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반가운 친구와 인사하고 아침 독서를 하고 미처 못 한 숙제 때문에 정신없는 아침활동 시간, 그 짧은 자투리 시간 안에 한 편의 동시를 , 그것도 그림과 함께 완성하라는 억지를 일년 내내 부렸고, 몇몇을 빼고는 신기하게도 그럴듯한 시들을 척척 생산(?)해 준 여러분들의 저력에 놀라움과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에게 단 20분의 시간을 주면서 한 편의 시를 쓰라고 한다면 절대로 못했겠지요. 여러분들이니 가능함을 알고 있기에 괴롭고 힘든 일인 줄 알면서도 강행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우리들의 현실에서 시간표에 없는 그 무엇을 규칙적으로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빗물이 바위를 뚫듯 5학년이 되어 우리들의 생활과 생각과 느낌을 짧은 노래로 만들어 종이 위에 가두기를 거듭한 결과 이렇게 멋진 한 권의 동시집으로 여러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춰보았을 때는 그저 그런 낙서처럼 보일 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작은 흔적들을 하나로 묶었는지 고개를 갸우뚱 거릴 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의 경험과 생각과 느낌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데 뭐 특별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호들갑이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과 선생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이들에게 묻겠지요? 당신들도 참말 그랬는지 그 경험과 생각과 느낌을 지금 우리 앞에 내어놓아 보라고.......
우리들에게 이 한 권의 작은 묶음은 그 어떤 훌륭한 시집보다도 맛있고 향기로우며 영원히 간직하고픈 소중한 보물입니다. 이 한 권의 어눌한 동시집 속에는 콩나물, 시금치, 계란, 고추장, 참기름이 버무려져 한 그릇의 맛있는 비빔밥이 되듯이 우리들 5학년5반의 삼백 예순 날이 고스란히 들어있고 여러분들의 꿈과 소망, 슬픔과 좌절, 아픔과 즐거움들이 여러분들만의 언어로 정말 진솔하게 버무려져 여러분 하나하나의 개성이 담긴 새로운 맛을 내고 있는 나만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겨우 열 두 살 의 고개를 넘는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소중한 시집 한 권씩을 묶는 그 힘든 과정을 다 지켜보았기에 그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목이 터져라 축하의 노래를 불러주고 싶습니다. 한 번 가면 다시는 붙잡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바람 같은 인생 시계에서 열 두 살의 지점을 조금은 간직할 수 있게 됨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살면서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어려움과 만났을 때, 한 번 쯤 이 동시집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추억여행을 하다 보면 불현듯 엉킨 매듭을 풀 수 있는 삶의 지혜와 희망이 여러분들 가슴을 다시 힘찬 박동으로 두근거리게 하는 마법의 힘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조금 더 큰 소망을 품어보아도 될까요? 이 동시집이 밑천이 되어 아름다운 우리말을 여러분 마음대로 더 아름답게 주물러 부려써서 지구가족 모두의 가슴에 자랑스러운 우리말을 가득가득 채워주는 우리말 놀이꾼이 한 명쯤은 나왔으면 하는 야무진 소망 말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여러분들의 동시집을 정리하며 마무리 할 수 있음에 가슴 벅찬 행복을 느낍니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여러분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까르르 쉴 새 없이 터져 나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5학년 5반 제자이자 소중한 친구들의 첫 동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2015년 12월 18일
손성란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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