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에서의 나의 편견
교사가 되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아닌 교사들의 모습 때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촌지와 편애가 특히 나를 괴롭혔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촌지가 성행하던 시기였고 촌지를 하지 못하는 형편을 부끄럽게 여길 만큼 당연한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특히 반장이나 부반장을 하게 되면 일 년에 몇 번 쯤은 촌지를 드려야 했고 소풍 때는 선생님의 도시락을 챙기느라 무거운 가방 때문에 소풍이 가기 싫을 정도였다. 선생님들이 한 곳에 모여 계신 곳에 어머니가 준비한 도시락을 내려놓으면 각반 어머니들의 음식솜씨가 자연스럽게 비교되는데 우리 어머니의 음식이 볼품없거나 맛이 없으면 고생한 보람도 없이 담임의 좋지 않은 눈길을 오랫동안 받아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월말고사에서 우리 반이 일등을 하거나 내가 일등을 한 경우에도 동학년 선생님들의 간식을 준비해야 했는데 매번 어머니에게 부탁드리기가 어려워 준비를 못한 경우에는 대놓고 아이들 앞에서 ‘가난한 사람은 공부를 잘해도 괴로울 때가 있다.’거나 ‘다른 반 선생님들께 미안해서 다음 달에는 공부를 살살 가르쳐서 절대 일등이 우리반에서 나오지 않게 해야겠다.’는 등의 말을 간식을 준비할 때까지 들어야했다.
우리 부모님은 평생 시골에서 살다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맨손으로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말단 사원의 월급으로 아이 셋을 키우기가 힘들어 어머니가 세를 내어 조그마한 구멍가게까지 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돈도 없고 시간도 없이 사는 가난하고 여유 없는 집이었다. 이런 형편에 고급스럽고 예쁜 도시락은 구경도 못해보았을 것이고 시골 사람이다 보니 모양보다는 양에 치우친 간식이라 그걸 전달하는 나 역시 난처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어렵게 준비해 주신 것을 안 가져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6학년 7월 월말고사 후의 일이었다. 그 때도 내가 일등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께 쭈뼛거리며 어렵게 입을 떼었는데 때마침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농사지은 참외와 수박, 토마토 등의 여름과일이 집에 도착해 있어서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채운 후 거의 20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과일들을 준비해 주셨다. 준비한 과일을 학교에 갖고 가야 하는데 엄마와 나 둘이 들기엔 너무 무거워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 집 앞으로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몇 명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친구들을 불렀고 그 친구들과 함께 대여섯 명이서 끙끙대며 그 무거운 아이스박스를 들고 교실로 들어섰다. 우리 반엔 이미 6학년 선생님들이 모두 다 모여서 간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이스박스를 선생님들 옆으로 낑낑대고 들고 가자 담임선생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일어나시더니 우리 반에서 제일 부잣집 아들로 알려진 한 남자친구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아이고, 일등도 안했는데 역시 너희 엄만 통이 크구나, 너 땜에 우리 반 체면이 섰구나!”하시면서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셨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그 남자친구도 나도 아니라는 말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교실을 나왔고 그게 내가 준비한 거라는 것은 그 과일을 다 먹고도 며칠이 지나서 아이스박스를 찾으러 갔을 때야 알게 되었다. 왜 그때 말 안했느냐고 물어보시는데 울컥 서러운 느낌이 들어 눈물만 뚝뚝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난 선생님들을 더 좋아할 수 없었고 가정형편 때문에 교육대학에 진학을 하고서도 졸업하면 다른 일을 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막연한 생각뿐이었고 그때는 임용고시도 없이 졸업만 하면 성적순으로 발령이 날 때인지라 졸업과 동시에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경황도 없이 교사가 되어버렸다. 교사가 되고 나서 늘 나를 지배하던 생각은 당연히 가난하면서 공부를 잘하거나 가난한데 학급이나 전교임원에 되어버린 제자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그런 형편의 제자들에게 신경이 많이 쓰였고 부모가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임원자리를 포기하거나 기가 죽지 않도록 격려하는데 마음을 썼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형편이 넉넉한 아이들은 아예 그 아이를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예 내 관심 영역 안에 두려고도 하지 않았다. 부잣집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부모님의 돈 덕분에 과외며 학원이며 치맛바람으로 된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그 아이가 어떻게 노력했고 얼마나 성실했는지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기 아이를 잘 봐달라고 촌지를 들고 학교를 찾아오는 학부모님들에게 겉으로는 상냥하고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속으로는 돈으로 자식을 망치는 학부모, 정성과 사랑보다는 물질로 자식을 쉽게 교육하려는 게으르고 무식한 학부모로 생각하며 경멸했던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은 결혼을 해서 첫아이를 낳고 첫아이가 처음으로 유치원에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유치원 첫 선생님에 대한 나의 마음은 참으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었다. 겨우 대학을 갓 나온 이십대 초반의 아기 선생님인데 늦은 결혼과 늦은 출산으로 또래의 학부모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학부모였던 내가 그 선생님께 어찌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던지 눈도 잘 못 맞추고 말도 더듬을 만큼 쩔쩔매는 내 모습에 나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초등학교 때부터 웅변도 하고 늘 반장이었고 이미 교단경력 15년을 넘긴 내가 얼마나 말을 더듬었는지 그 귀여운 아기 선생님께서 날보고 했던 첫마디가 “어머님, 입이 아프신가 봐요!”였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에피소드지만 그 일로 인하여 학부모가 선생님을 대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학교에 오셔서 학부모님과 대화를 할 때 말투며 화법이 꼭 교사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쁠 때가 참 많았다. 앞뒤로 가벼운 인사치레도 없이 직접 본론으로 들어가 자기 할 말만 한다던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때는 화가 날 지경이었고 특히 화려한 옷차림으로 선물을 들고 와서 선물부터 턱 책상에 얹어놓고 적선이나 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요구하거나 세상에서 제일 힘들지만 돈은 못 버는 사람을 대할 때의 동정심을 담은 눈빛과 말투를 담아 대화를 주고받을 때는 멀리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막상 학부모가 되어 보니 선생님을 무시하거나 뭘 요구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데 지나치게 긴장하고 아이를 예쁘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다보니 내 마음과는 다른 이상한 말들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마치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아픈 증상을 자세히 말하고 왜 그런 건지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갔는데 막상 의사선생님 앞에서는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하고 그냥 나와서 집에 오는 길에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에 어이가 없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었다. 나처럼 말하는 직업을 가진 교사인데도 이런 정도인데 사람들 앞에 나서본 일이 별로 없는 전업주부들은 오죽할까 싶은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과거에 가난으로 차별받았던 내 모습 때문에 오히려 여유 있는 집안의 제자들이 나에게 역차별을 받았구나 싶은 생각에 너무 반성이 되고 부끄러웠다. 부자면 부자인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는 비슷한 분량의 역경과 행복이 공존하는 것인데 내 경험만으로 제자들과 학부모를 판단하여 그렇게 대한 것은 분명 차별이고 편견에 치우친 행동이었다는 것을 겨우 깨달은 것이다.
이제 교직에 들어선 지 벌써 30년, 내 아이들도 다 성장했고 우리 집의 경제도 큰 부자는 아니지만 우리 부모님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안정되었고 여유도 있다. 하지만 성장기의 내 가난은 여전히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내 생활의 전반, 의식주며 그 밖의 문화생활 등 모든 면에서 겉으로는 남들과 비슷하게 흉내는 내고 있지만 내면은 궁상스러운 면이 많음을, 그 궁상스러움이 곳곳에서 자주 튀어나옴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내 궁상의 잣대를, 내 학창시절 상처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다짐을 수시로 하면서 대하려 노력하고 있다. 부모가 가난한 것이 자식의 탓이 아니듯이 부모가 부자인 것이 내 제자들의 잘못 또한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도 가난한 아이를 더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물질적 부가 결코 정신적 부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에게 와준 귀한 생명들인 개구쟁이 제자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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