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젠 ‘인천사람’이라 말하고 싶다 -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를 읽고 - 다원 손성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던가, 지금은 사라진 하인천 부두에서 짚으로 만든 돗자리가 깔린 여객선에 누워 딩굴딩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굴러다니며 한숨 자고 일어나면 충청남도 당진 삼화리 보덕포에 도착했다. 충청도 사투리로 보데기라고 불렀던 그곳에 내리면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던져오는 첫인사가 “아이고, 서울아기씨, 오셨네!” 였다. 분명히 나는 인천 송림동 노동회관 근처의 쓰러져가는 한옥집에 사는 인천아이인데 시골사람들은 한 치의 의심 없이 나를 서울에서 온 귀한(?)아이로 부추겼다. 물론 할아버지와 아버지, 고모, 삼촌, 외할아버지, 어머니, 이모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보데기라는 어촌과 농촌이 반씩 어우러진 깡시골의 한 쪽방에서 태어났지만 시집살이를 못 이겨 인천으로 분가한 부모님 덕에 일곱 살까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당진에서 조부모님과 살다가 부모님이 계신 인천으로 소위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나고 자란 곳이 시골인지라 방학 날 인천을 떠나 개학 전 날 인천으로 돌아오는 철새 같은 생활을 했다. 그런데 함께 시골에 살 때는 촌무지랭이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시던 동네 어른들이며 심지어 친구들까지 엄연히 인천에 사는 나를 서울아이로 승격시켜놓고는 귀한 공주 대하듯 사뭇 전과는 대접이 다른 것이 참 이상했다. 어린 맘에도 ‘아, 서울은 참 좋은 곳인가 보구나, 높고 귀한 사람이 사는 곳이 틀림없어’라는 생각을 했고 열 살 무렵부터는 아예 어디 사느냐고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서울에 산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래놓고는 어느 밤엔가 당진 사람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는 “여기가 무슨 서울이야, 인천이잖아!”하면서 마구 화를 내는 꿈을 꾸다가 가위에 눌리는 경험을 하기도 했었다. 그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야 겨우 전깃불이 들어오고 하루에 버스가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밖에 다니지 않던 깊은 시골에서 가장 손쉽게 오갈 수 있는 화려한 도시가 바로 인천이었는데도 충청도 사람이 유난히 많이 인천에서 터전을 잡아서 인지 인천에 살아도 자신을 서울에 산다고들 이야기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올해로 37년째 인천에서 살고 있는 나도 내가 인천사람이라기 보다는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잠시 머물고 있는 나그네가 아니었나 싶다. ‘인천은 서울의 관문!’ 그저 서울로 통하는 하나의 문에 불과한 골목길과 같은 도시라는 인식은 교과서의 ‘관문’이라는 표현으로 더 명확하게 내 가슴에 새겨졌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돈이 좀 있거나 서울에 친척이 있는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실력이 부족해도 5학년 겨울방학이 되면 유행처럼 서울로 전학을 갔다. 결과적으로 서울로 전학을 간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를 나와 변호사니 의사니 하는 전문직을 갖고 살고 있어, 여전히 인천을 떠나지 못하고 인천에서 대학을 나와 인천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인천에서 결혼을 하여 내 아이 역시 인천의 학교에 보내고 있는 나와 견주어 볼 때 보다 더 질 높은 우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천은 그저 서울로 진입하기가 수월하여 최초로 기찻길이 놓인 도시, 중국과 교역하는 보따리장수들이 많은 지저분한 선박의 임시 대기처, 방직공장이 많아 시골처녀들이 몰려들어 어설픈 서울처녀 흉내를 내며 남자형제의 학비를 대는 곳, 대우자동차 분규로 노동자들의 애끓는 탄원과 호소가 몇 년간 주요 뉴스 화면을 뒤덮어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도 그들의 사정을 다 아는 듯한 착각을 하며 도리어 눈살을 찌푸리는 문제양성 도시, 이제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서울의 부자들이 내려와 땅 투기, 아파트 투기를 일삼아 전국에서 부동산 가격이 가장 저렴하던 도시에서 투기제한구역이 가장 많은 도시로 승격된 슬픈 곳 정도의 인식이 무의식의 깊은 곳에 깔려 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확인하고 내 자신이 참 슬프고 한심한 위인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랬다. 나는 멍청도 당진사람도, 짠물 인천사람도, 깍쟁이 서울사람도 아닌 부질없는 나그네였다. 자신이 왜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 몸과 마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지, 왜 스스로를 나는 인천사람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조차 갖지 않은 채로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다. 다소 딱딱해 보이는 기사형식의 조각글들이 모인 인천이야기를 읽으며 사십년 가깝게 인천에 살아온 내가 얼마나 예의 없는 무지한 인간인가를 한탄하였다. 새롭게 다가오는 인천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 그 어느 한 순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매순간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풍랑을 겪어낸 인천의 필연적 역사와 문화와 그 속에 있었던 인재의 절묘한 버무림이, 아무렇지도 않게 스치고 부딪치고 만지고 먹고 입고 타고 다니던 나의 일상에 빠짐없이 흡수되어 이미 나의 한 부분임을 알고 통곡하고 싶을 만큼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나도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당당하게 제 몫을 해낸 인천의 한 사람, 진정 인천사람이고 싶은, 인천사람의 정체성을 찾게 된 것이다.
대학시절, 자고 나면 이승만 박사의 두상이 떨어져 나가고 붙여놓으면 또 떨어져 나가고, 흔적도 없이 부셔버리자는 외침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은 정치적 인간으로써의 이박사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피땀으로 모은 하와이 교민들의 돈을 기부 받아 미국의 MIT와 같은 공과 대학을 만들자고 제안했던 이박사의 노력으로 인천의 ‘仁’과 하와이의 첫 글자를 빌려와 ‘‘仁荷’로 이름을 지어 의미를 부여한 것이 오늘날의 인하대학교라고 생각하니 어려운 역사적 시련기에 그것도 해외거주교포의 열망이 모여 100년 후의 교육을 내다본 혜안에 다시금 감동하지 않을 수 없고 현재 의과대학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써의 위상과 수많은 졸업생들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기여도를 생각할 때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 모두의 재산이요, 학문의 요람이요, 미래요, 인천에서 눈물과 희망으로 배를 탔던 해외 이주민이자 우리 인천시민의 꿈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독거노인들의 쓸쓸한 산책로가 된 자유공원은 또 어떤가? 야산에 불과했던 부근에 외국인들이 모여들어 볼거리가 될 만한 별장을 짓고 살게 되면서 최초의 서구화된 공원의 형태가 나오고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며 인천이 세계 속의 한 지점으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맥아더 동상 문제로 오랜만에 다시 관심을 끌게 된 자유공원은 자유를 위한 각국의 희생과 염원이 스며있는 아름다운 휴식처인 것이다. 놀이기구가 옮겨간 이후로 젊은이들의 발길이 뜸해졌지만 자유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중국인 마을, 송도 앞바다 등의 정취는 그냥 우연히 자리 잡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뭉클함을 준다. 그래서 일까? 사할린 복지회관에 계시는 노인 분들이 두고 온 사할린의 가족들을 마음으로 더듬는 장소로 유난히 이 공원을 좋아하시는 까닭이……. 어떤 목적으로 생긴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경기은행에 드나들며 입출금을 하다가 어느 날 보니 없어져 버린 경기은행의 설립과정에서의 인천기업인들의 꿈,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 그림자료 속에서 근사하게 교환원 옆에 서서 전화통화를 하는 고종황제의 우스꽝스런 모습이 서울과 인천사이에 개통된 시외전화가 생긴 지 3일만의 일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 했던 김 구 선생의 목숨을 이어준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다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 때 만일 김 구 선생이 인천 감옥이 아닌 다른 지방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외전화가 연결되지 않은 곳, 인천이 아닌 다른 곳 말이다. 1897년 신축되어 사적 제287호가 된 답동 성당은 인천개항,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4.19혁명 등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인천시민의 안식처이자 피난처이자 학교이자 병원이자 복지시설이었다. 이미 백년을 훨씬 넘어버린 이 성당은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홍요셉 신부의 포교활동을 시작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고 가톨릭회관이 건축되기 전까지 낮12시와 저녁6시에 세 개의 종이 은은하게 인천 시가를 울리던 붉은 벽돌의 장엄한 상징물이었다. 또한 박문유치원, 박문여고, 해성병원의 설립으로 교육, 빈민구제, 선교활동도 병행하였다. 지금은 밀집한 상가건물 속에 묻혀 그 옛날의 위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오늘도 소외된 이웃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참인천인들과 함께 인천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연수구 연수동 적십자 병원 옆에 반듯하고 깔끔한 현대식 건물로 신축되어 이전 운영되고 있는 인천우체국은 중구 항동 6가 1번지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허물어지지 않은 개항관련 건물 중 하나로 우리나라 최초로 여자우편배달부를 도입한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비록 일본인들이 본국과 통신하기 위해 세운 우편국에서 시작하여 우정총국 인천분국을 열면서 실질적인 인천우체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상재와 홍영식, 김광집 등이 일본 우편업을 자세히 살핀 후 조선에도 빨리 우편을 개설하도록 권하였다는 항목에서 이미 정보통신의 메카로 발전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효시를 찾는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아직도 고색창연한 항동 거리에서 붉은 자전거를 타고 시민들의 애환을 실어 날랐던 초창기 집배원 아저씨들의 모습이 눈에 어림은 버튼 하나로 우표도 없이 순간적으로 소식을 나누는 디지털 시대에 좀 뒤떨어진 향수일까?
아무 것도 없는 나그네들의 도시, 타지 사람들이 많아 삶의 터전으로 파헤치기만 하고 다독거리지 않는다는 도시, 인재를 서울로 뺏기고 문화를 서울로 양보하고 오로지 역사의 오물만을 대신 처리하는 길목의 도시로만 알고 있던 인천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인천 기상대, 환한 미래를 예고하며 어두운 현실을 빛으로 감싸 안았던 성냥공장, 르망으로 뽑을 내던 대우 자동차, 노동의 역사 속에 언제나 살아있는 동일방직, 개신교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내리교회의 종교적 힘, 인천어부들의 친구로 100년이 넘도록 밤바다를 지키고 있는 팔미도의 등대, 아아, 그리고 백두산도 한라산도 인천 앞바다가 있어서 측정이 가능하다는 사실, 우리나라 국토 높이의 기준점이 인천에, 바로 용현동에 있는 인하공업전문대학 캠퍼스 안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어쩌면 국제도시를 계획하고 있는 꿈의 유비쿼터스 송도신도시가 세계로 뻗어가는 원점이 될 것이라는 이미 오래전에 계획된 예언적 비젼의 실행이 아닌가 싶어 몹시도 가슴이 뜀은 오로지 나의 과대망상만은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김을 어쩔 수 없다. 이제 나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서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는 나그네가 아니다. 이제 나는 담긴 것이 너무 많고, 담을 것은 더욱 많은 내 고장 인천의 자랑스런 한 시민임을 이 한 권의 책을 통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나그네의 오만함으로 인천의 거죽만을 부여잡고 내어놓을 줄 모르던, 진정 나그네처럼 지나는 곳곳을 즐기고 사랑할 줄도 모르던 못난 손님에서, 서투른 망치질에 피멍이 들어도 인천이라는 유서 깊은 한옥의 주인이 되어 허술한 곳을 찾아 메우고 전망 좋은 쪽에 창과 문을 내어 반갑게 길손을 맞아들이는, 서울의 번잡함과 허황함 없는, 내 집의 곳곳, 구석구석을 모두 알고 사랑하며 쓰다듬는 진짜 주인으로 이 곳 인천에 머물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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