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밭/산 문

뭐 하러 같이 읽어?

길길어멈 2023. 9. 30. 11:16

 

공부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을 한 번 들으면 대체로 잘 이해하는 편이었고 기억력도 나쁘지 않았기에 전교 1등은 아니어도 학급에선 초중고 내내 상위 그룹에 속해 있었다. 전기도 없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골 할머니 댁에서 일곱 살까지 지냈는데 한글을 일찍 익힌 바람에 고모들과 삼촌이 읽던 몇 안 되는 책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집성촌이었던 시골 할머님 댁 근처엔 아이라곤 나 혼자뿐이었고 대부분 노인들이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일을 나가시면 혼자 집에 있기가 심심하여 같이 따라가 밭둑에 앉아 책을 읽거나 땅바닥에 그림이나 글씨를 쓰면서 놀았다. 게다가 늘 어른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쓰는 단어들은 아이의 언어가 아니라 시골 어르신들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이어서 소위 말하는 애늙은이가 바로 나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부모님과 두 명의 남동생이 살고 있는 인천으로 유학(?)을 왔는데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두 남동생은 갑자기 나타난 내가 낯설었던지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내게 가까이 오질 않았고 나 역시 부모님도 남동생들도 낯설었다. 부모님과 두 동생은 마음 잘 맞는 한 팀으로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 같았기에 소외감이 들었고 그럴수록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과 고모, 삼촌이 몹시도 그리워서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시간이 수년간 계속되었다.

젖도 제대로 못 뗀 돌쟁이를 시댁에 맡기고 도시로 살림을 나간 것이 미안했던지 부모님께서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뭔가를 자꾸 사주고 싶어 하셨고 도시 아이들이 갖고 노는 인형이라든가 예쁜 옷이라든가 하는 것을 잘 몰랐기에 늘 책을 사달하고 했던 것 같다. 시골에서 또래 아이가 없다 보니 친구를 사귀는 것도 어색했고 시골 사투리를 쓰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놀려대는 친구들 곁에 선뜻 먼저 다가가지 못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시의 부모님 집에 와서도 방구석에 박혀 홀로 책 읽기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학교에서 글짓기 대회를 하면 대부분 상을 받았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특별히 글을 잘 썼다기보다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사용하지 않는 토속적인 낱말들을 많이 쓰고 어른스러운 생각이 들어가 있어 뽑아준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도시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득한 나에게 좋은 학업성적과 글쓰기 대회의 잦은 수상은 나의 자존감을 올려주었고 친구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방학하는 날이면 시골 할머니 댁으로 갔다가 개학 전날 돌아왔던 생활 패턴에 변화를 주어 중학교 3학년 때쯤부터는 방학이 되어도 더 이상 시골로 도망가지 않게 되었다.

결국 별다른 놀이감과 또래 친구가 없어 가까이하게 된 책 읽기가 내 생활의 전반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준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의도적으로 책 읽기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되었다. 게다가 부모님께서는 내가 어떤 책을 읽든 상관하지 않고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무조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셨기에 심지어 시험 기간 중에 잡지나 만화책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대견해 하셨다. 어디 그뿐인가. 예전에는 방문판매하시는 분들이 수십 권의 전집을 한 질로 묶어 큰 액수를 받고 할부로 팔기도 하였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에게 세계문학전집과 한국고전문학전집을 덜컥 사주신 것이다. 지금처럼 독서 수준이 연령별로 세분화되었던 시기가 아니어서 어머니께서 들여놓은 책들은 적어도 고등학생 정도는 되어야 이해가 가는 책들이었다. 하지만 현학적(衒學的) 자만심으로 가득했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빨간 머리 앤을 읽던 수준으로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를 비롯하여 고전 원문에 가까운 춘향전, 토끼전, 옹고집전 등을 읽어댔다.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 고전문학 시간이 그리 낯설지 않았고 학력고사에서도 대부분의 친구들이 어려워하는 국어문항을 수월하게 풀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문학 전집을 대학에 가서 다시 읽었는데 초등학교 때 이해했던 것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어서 황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책이면 무조건 다 좋은 줄 아시고 무언가를 읽고만 있으면 대견해 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어른이 되어서는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거나 친척들이 오시거나 하는 번잡스런 일이 있을 때마다 급히 읽어야 할 책이 있는 것처럼 책상에 앉아 꼼짝하지 않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외향적이지 못한 성격도 혼자만의 책 읽기에 몰두할 수 있었던 원인이었고 이런 나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학교 성적 또한 늘 그럴 듯 했고 각종 시험에 낙오하는 일 없이 한 번에 합격했던 일 역시, 이런 나의 독서 습관을 지속시키는 원인이었던 것 같다. 가끔은 당면한 일이나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고 뜬금없이 책 속으로 도망가기도 하는 내 모습이 참으로 게으르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마흔다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소설 읽기 수업을 듣게 되었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6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황순원의 <소나기> 정도의 소년소설이 가장 높은 수준의 산문이었고 책을 가장 많이 읽을 것 같은 직업군인 초등교사가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긴 소설보다는 짧은 시간에 끊어 읽을 수 있는 에세이 종류나 교재 연구를 위한 설명문 읽기, 화장실에서 읽는 다이제스트 정도가 내 책 읽기의 전부가 되어 버렸던 시기였다. 그런 이유로 요즘 읽히는 소설을 접해 보기도 하고, 잊었던 독서력을 되찾아 보자는 욕심으로 수강을 했고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과제며 리포트를 최선을 다하여 제출하였다. 수업시간은 교수님의 일방적인 강의로 일관되어서 부담이 없었고, 읽어 오라는 소설은 재미있었다. 소설의 내용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 문학사적 위치와 가치 등이 주 강의 내용이어서 한 학기 내내 흥미롭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B 학점이 나온 것이다.

 

대학원에서 출석과 과제 제출, 발표 등을 성실히 이행할 경우 웬만하면 A 학점 이하의 평가는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었기에 충격이 매우 컸다. 그리고 동기들 중 B 학점을 받은 사람은 오로지 나 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나의 소설 해석이 웬만치도 못한 수준이었다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과제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김영하의 단편 중 <오빠가 돌아왔다>를 읽고 자신이 논점이 될 만한 주제를 잡아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 한 가지와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오빠가 돌아왔다> 연극을 보고 감상문까지 써서 제출하는 것이었다. 학교 근무를 마치고 전철을 타고 혜화동 소극장까지 가서 연극을 보고 집에 오니 자정이 넘었었고 그 밤을 다 새워 최선을 다해 감상문을 써서 냈는데 너무 억울했다. 퇴근 시간이 늦어 서울까지 올라가 따로 연극을 감상할 시간이 여의치 않았던 중고등학교 동기 선생님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만으로 감상문을 제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 마음은 더 지옥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떤 점이 부족했을까?

 

소설 읽기 수업 평점에 대한 상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수년 동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국어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자주 소설을 접하고 학생들과 함께 주제 찾기와 내용분석을 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논제를 잡고 감상을 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을까? 하는 정도의 짐작을 품은 채로 지내다가 어느 순간 나의 독해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해석이 일반적이지 못하거나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관점이 지나치게 왜곡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껏 한 번도 내가 쓴 글에 대한 평가가 야박했던 적이 없었기에 내가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해석하는 모든 것들이 대체로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이 내 안에 자리 잡아 굳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설렘으로 시작해서 상처로 남은 소설 읽기 수업은 끝이 났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10년 쯤 지나 나의 교직 생활도 끝이 났다.

건강상의 문제로 정년을 7년 앞두고 자의로 명예퇴직을 하기는 했지만, 33년간 몸에 배어 버린 교사로서의 정체성은 그토록 갈망했던 소위 백수 전업주부의 생활을 무턱대고 행복하게 느끼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어떻든 간에 내가 살아있다는 최소한의 생존 신고를 해야만 견딜 수 있는 날들이 펼쳐졌다. 시간에서 놓여나 내 맘대로 하루를 아주 느리게 꾸리고 싶었던 욕심은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짜여진 시간의 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작하게 된 것이 함께 읽는 독서프로그램이었다. 책을 함께 읽는다니 어떻게? 한 문단씩 돌아가면서 읽나? 하는 궁금증을 품고서 말이다.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독서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 행해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고 이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습관처럼 해왔던 일이니 크게 새로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활동이라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어 선뜻 독서모임에 합류하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책을 함께 읽는다는 모임의 목적보다는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 그러나 교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하면서 나와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아가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욕심도 작용했던 것 같다. 그렇게 혼자만의 읽기에서 함께 읽기가 시작되었다.

 

3년 전 첫 독서모임을 하러 집을 나서던 날,

내 뒤통수에 대고 남편이 했던 한마디

 

집에서도 매일 책만 읽으면서 뭐 하러 또 같이 읽어?”

 

남편 말 틀리는 것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각자 읽어 온 책에 대한 생각과 느낌, 깨달음 등을 공유하던 그 첫 모임에서 비로소 잊고 있었던 대학원 소설 읽기 평가에 대한 상처가 씻겨 나감을 느꼈다. 내가 B 학점 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거의 15년 만에 스스로 납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0대에서 60대 후반까지 각기 다른 연령대로 오랜 기간 해외에서 살다가 온 분, 평생을 전업주부로 현모양처를 꿈꾸며 생활해 온 분, 나처럼 일을 그만두고 자유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 여전히 현역으로 교수로, 수간호사로, 학원 강사로, 자영업자로, 예술인으로 활동하는 분들,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취미생활로 전문가급의 실력을 갖춘 분, 평생을 주택에서 정원을 가꾸며 사신 분, 들꽃을 찾아 전국을 다니는 분 등으로 구성된 회원들과의 첫 모임에서 같은 문장 한 줄로도 각기 다른 해석과 생각, 깨달음을 토로하는 장면을 만나니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내가 혼자 읽고 받아들이고 이해해 온 내용들이 오롯이 검증되지 않은 내 기준의 거름 장치만을 통과하여 심지어 오독(誤讀)으로 간직되어 있는 지도 모른 채, 내 안에 갇혀 있을 수 있었겠구나 하는 두려움과 만나게 되었다. 그 순간 책 읽기에 대한 나의 오만함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새삼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석하여 오히려 읽지 않는 것만 못한 독서의 위험성과 대면하며 속으로 전율했던 그 순간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랬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툼 없이 사이좋게 살기 위해 예절이 필요했던 것처럼 독서의 여러 가지 목적 중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원활한 소통이라는 생각이다. 지금의 나에게 물어본다.

 

너는 책을 왜 읽니?

 

지식과 지혜를 얻고 때론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내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도 하지만 딱 한 가지만을 꼭 집어 말하라면 나는 나와 타인을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양을 다지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와 너, 우리를, 더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고 소통하며 보다 사람답게 어울려 살 수 있기 위해, 함께 살아가는 삶의 길을 함께 개척해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가장 개인적인 행위이면서 가장 사회적인 행위가 독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가 없다면 소통이 왜 필요하겠는가? 나 혼자가 아닌 너와 함께 하기에 그리하여 우리로 존재하기에 읽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같이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