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다원 손성란
영화 「Reign over me」는 9.11 사건이라는 상상하지 못했던 충격적 사건으로 아내와 세 딸을 잃은 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찰리와 잘 나가는 치과의사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삶에 대한 지나친 책임감으로 하루하루가 힘든 앨런의 이야기이다.
개인의 실수가 아닌 천재지변과 같은 테러를 겪은 한 남자의 상처받은 삶이 평범한 친구의 우정을 통해 치유되어 가는 과정을 심리드라마 형식으로 보여 주는데, 심한 외상을 겪은 후 회피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급작스런 외상으로 인한 스트레스 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뭉쳐져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할 만큼 커져버린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겪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모습까지 함께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란 ‘일반적인 인간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혹은 ‘일반적인 적응 능력을 압도하는 특별한 사건’을 경험한 후에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한다. 전쟁, 재난은 물론 강간, 중요한 사람의 죽음, 심한 좌절의 경험 등을 체험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으로, 무수한 사건과 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는 현대사회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갈수록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PTSD에 우리 모두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찰리 파인 맨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평범한 가장이던 찰리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 9.11 테러로 어이없이 가족을 잃고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 이 사건으로 찰리는 PTSD의 여러 증상 중 회피를 택하고 그 속에 들어가 상처를 꽁꽁 싸맨 채, 아니 자신의 모든 과거까지 송두리째 잃어버린다. 자신과 관련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은 물론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은 특별히 더 없다. 9.11 사건 이후 찰리는 스쿠터를 타고 매일 뉴욕의 밤거리를 돌아다닌다. 머리에는 항상 흘러간 음악이 담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이외의 다른 소리는 듣지 않는다. 낮과 밤의 구별도 없다. 대개의 사람들이 모두 잠을 자는 심야시간엔 코미디 영화를 본다.- 반드시 코미디만을 고집하고 팝콘을 먹으며 과장되게 웃어주는 리엑션을 보여주며-. 집안엔 밴드 연주를 할 수 있는 음악방이 있어 맘이 내키면 미친 듯 연주를 하고 오래된 LP 수집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먹고 싶으면 아무 때나 중국음식점에서 요리를 먹어대고, 아이들처럼 거대한 괴물과 싸우는 ‘완다와 거상’이라는 컴퓨터 게임에 몰두한다. 물론 현실과는 달리 게임 속에서 찰리는 칼과 화살로 괴물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고 옛날 음악에 대한 견해도 확고하다.
또 두 달에 한 번 주방을 끊임없이 리모델링 한다. 〮언뜻 보면 복잡한 인간관계와 일에 얽혀 정작 자신이 원하는 일은 하나도 할 수 없는 현대인들이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그런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을 한껏 누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특히 그와 함께 치과대학을 다니며 2년간이나 같은 방을 쓰던 흑인 친구 앨런의 눈에는 더욱 그렇다. 9.11테러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매스컴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앨런의 눈에 어느 날 스쿠터를 타고 달려가는 찰리의 모습이 발견되는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앨런이 혼자 스쿠터를 타고 뉴욕 시내를 달려가는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사실 이 끝 장면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나의 느낌을 좀 남기고 싶은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찰리와 앨런과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PTSD 치료과정 중에서 찰리의 회복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보려했지만 찰리와 같은 큰 외상을 겪지 않아서 인지 오히려 치료자 역할이었던 앨런의 삶이 회복되어 가는 과정에 더 애정이 갔다. 찰리의 모습이 걱정스러우면서도 찰리의 자유가 부러운 앨런의 눈빛과 마음이 스크린을 통해 충분히 전해져 왔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장인과 장모의 방문마저 거부하며 과거를 돌이키게 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소통을 닫아버린 찰리, 심지어 치료를 위해 과거를 묻는 유일한 친구 앨런에게까지 수시로 분노를 터뜨리는 찰리는 거의 움직이는 시한폭탄 수준이다. 정신과 치료를 강권하는 앨런의 마음을 거절하지 못하고 진전 없는 정신과 상담을 받던 찰리는 의사로부터 누군가에게 그날의 사건을 모두 털어놓아야 이 질곡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충고를 듣게 된다.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거부할 만큼 들춰내기 싫었던 기억들과 정면으로 대면해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다는 메시지이다.
정신과 의사의 진정어린 상담에도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찰리는 어느 날 자신의 고통에 못 이겨 앨런에게 사건 당일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한다. 오늘 같은 내일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줄 알았던 그 시절,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살로 한참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며 재롱떨던 딸들의 이야기와 주방을 고쳐달라고 하던 아내의 부탁을 바쁜 업무 때문에 건성으로 듣고 무시했던, 그 통화가 마지막인지도 모르고 그 어느 날 보다도 무성의한 형식적인 대화를 했던, 자신이 아내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깨닫지도, 또 표현하지도 못했던 그 날의 기억을 모두 쏟아낸 찰리는 권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난동을 부리고 말리려는 경찰에게도 폭력성을 부리며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버리고 만다.
이 일로 찰리는 여러 차례의 재판을 겪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과거들과 또 다시 대면하게 되고,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병적인 모습이 재판장에서 공개되어 정신병원에 격리 수용되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이 때 딸과 외손주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던 장인과 장모의 상처가 드러나고,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오로지 가장으로써의 책임감에만 묶여있던 앨런의 상처도 가시화 된다. 또한 믿고 있던 남편의 외도로 갑작스런 이혼을 한 후 앨런의 치과에 환자로 찾아와 성적인 요구를 했다가 거절하자 소송을 걸어버리는 리마라는 여인의 상처도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숨기고 있었을 뿐 서로의 가슴 속에 들어있던 아픔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재판과정에서 찰리의 병적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던지던 리마의 외침
“난 왜 사람들이 찰리가 상처받은 거라는 걸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심장이 뜯겨 나갈 만큼 아프다는 걸 왜 모를까요?”
아마도 남편의 외도를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던 날의 아픔에서 오는 이해요 상처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또한 미국인 전체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 같은 판사의 견해도 기억할 만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문제는 단순한 가정사입니다. 나라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템플 맨(찰리의 장인)씨, 문제가 아주 심각합니다. 사위 분께서는 지금 매우 힘든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병원생활이 필요할 지도 모르죠. 그럼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건 그가 스스로 해결해야 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수많은 대화 중 압권은 아내를 잃고도 생존해 있는 장인장모를 돌보지 않고 나라에서 나오는 보상금을 독차지 한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산다고 생각했던 사위 찰리가, 딸과 외손주의 사진을 보며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장인장모에게 눈물로 외치던 대사이다.
“얘기하지 않고도 사진을 쳐다보지 않고도 전 항상 식구들을 보고 있어요. 길을 걷다가 다른 사람들 얼굴 속에서도 식구들을 봐요. 장인어른이 가지고 다니시는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인다구요. 힘드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두 분은 서로가 있으시잖아요. 두 분은 함께 시지만 전 혼자서 자나 깨나 식구들이 눈에 밟혀요. 어디를 가든지요. 하다못해 강아지도 보여요. 그만큼 죽을 지경이에요. 쉐퍼트가 지나가도 전 그게 푸들로 보인다구요!”
결국 무수한 사건을 겪은 후 찰리는 이사를 하고 현실과 직면할 준비를 한다. 무작정 회피와 마비로 일관하던 그가 앨런의 우정 어린 보살핌에서 상처를 치료할 힘을 얻었음을 암시한다. 현실과 싸우려는 최소한의 삶의 의지가 생긴 것이다. 이런 찰리를 보며 앨런도 잊고 있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사고 전 찰리의 모습이 지금의 자신의 삶과 너무나 똑같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소중한 것을 지킬 수도, 되돌릴 수도 없어 고통 받고 있는 찰리의 모습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대화의 단절로 형식적인 부부였던 앨런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전화를 하고 집으로 달려간다. 찰리의 스쿠터를 타고.......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의 행복에 대해 잘 모른다. 오히려 삶을 지루해하고 짜증스러워 하며 늘 벗어나는 꿈을 꾼다. 미련하게도 찰리처럼 갑작스런, 예감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어떤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저 그런 삶의 패턴과, 늘 마주보고 만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찰리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문의도 아니고, 국가의 책임 있는 보호도 아니고, 개인 이기적인 가족의 광적인 사랑-마더의 어머니와 같은-도 아닌 친구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한 친구의 우정 어린 지속적인 보살핌과 따뜻한 이해가 상처를 가진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스스로 치유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물론 9.11테러라는 대사건을 보는 미국의 국민정서도 한 몫 한다. 이 재난을 국가 전체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피해자와 관련이 있든 없든 무조건 보호하고 감싸 안아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영화의 전개가 좀 부자연스러운 면도 사실 있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지만 이건 아마도 부러움 섞인 질투의 시선으로 일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상처받은 사람만이 상처 입은 타인을 이해하고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과, 좀 이기적이지만 다른 사람의 큰 상처가 나의 작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된다는 것(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의 재확인이다. 거꾸로 말하면 나의 상처가 타인의 상처에 효과적인 치료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논점에서 좀 벗어났는지는 모르나 같은 어려움을 격고도 개인에 따라 PTSD의 강도가 서로 다르고 회복과정이나 속도에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렇다. 조금 두렵다고 해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놓고 서로 나누면 회복의 속도도 빨라진다. 또 치료 없이 시간을 치료제로 기억의 저편에 가만히 가라앉혀 두고 있는 상처는 작은 물방울 하나에도 거침없이 표면으로 떠올라 흙투성이가 되는 흙이 담긴 물 컵과 같다. 그러므로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컵의 물속에 담긴 흙을 과감히 떠내는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이다. 서로의 상처를 꺼내어 쓰다듬고 말려주는 과정에서 진정한 인간관계라는 또 하나의 꽃이 선물처럼 따뜻하게 피어오를 것을 기대해 보면서 말이다. 상처가 있으면 치료제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갈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이 치료제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상처를 만들어준 인간이라는 아이러니에 있다.
할머니 손만이 약손이 아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감싸 안고 사랑해내는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약손이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믿을만한 치료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 주는 따뜻한 영화였다.
Reign ove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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