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밭/산 문

나는 누군가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모두 내놓고 진솔한 대화를 하고 있는가?

길길어멈 2011. 11. 15. 12:34

 

내가 낳은 나의 아이들과 나는 솔직한 대화를 하고 있을까?

천만에, 내 속마음을 다 이야기 하면 우리 엄마 미쳤다고 할게 분명하다

사회적인 관습에 저절로 배어버린 누구보다도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이 사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갖고 있는 편견과 역할에 대한 기대감이다. 누가 시킨 것도 일부러 주입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 스스로....

 

배우자와는 어떤가?

살아온 세월만큼 서로를 드러내려 훈련하고 훈련받는 과정 속에서

어느 부분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이 많으면 늙어가며

서로 조금은 덜 소외되겠지만 한이불 덮고 잔다고 해서 대부분의 시공이 다른 한계가 극복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결혼 초에는 서로를 알고 알리고자 하는 의욕이 있어 밤이 새는 줄 모르고 대화도 하고 언쟁도 하고

심지어 투쟁도 불사하지만 익숙해졌다는 핑계로 오히려 남보다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아가는 데도 이해하는 척 적당히

합리화 하고 넘어가는 일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어쩌다 그래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짝인데 하는 존재감으로 마음을 열어보려 시도하지만

이미 일상에 젖은 생활언어로 물이 들어 깊은 이야기 나누기를 시도한 다는 것은 겸연쩍기가 이를데 없다.

 

그렇다면 친구는?

손가락을 들어 한 번 세어보자

그 친구의 속내를 모조리 겂없이 다 들어줄 수 있는 나인지....

치부를 가리지 않고 내 감정이 흐르는 대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어 놓고도 돌아서는 길에

찝찝하거나 뭔가 개운찮은 후회가 남지 않는 후련한 상대가 몇 명이나 있는지...

손가락이 모자라는 사람은 진정 성공한 사람일게다.

반개쯤을 오므렸다 폈다 망설이는 나를 들여다 보며

어울려 사느라 애들 키우느라 배우자에게 적응하느라 상대쪽 부모님과 하나 되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알 수없는 낯선 외로움들이 느닷없이 덥치기 일쑤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초,중,고,대학 동창모임에서

식사를 하며 안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꾸 술잔만 오고가는 것도

정곡으로 직진하지 못하고 헤매는 외로움의 파괴를 위한 동작들이 쉽게 튀어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가고 반복되는 만남으로 결혼은 했고 직업은 무엇이고 아이는 몇이나 낳았는지 등의 의례적인 개인사를 나누고 나면 낯선 사이는 아니나 겉만 익숙해지는 사이가 된다.

매달 옆자리에 앉아있다 돌아와도 내 옆 친구의 털끝 하나도 알지 못하고 돌아올 때의 부질없음이

봄도 여름도 없이 그저 일년내내 찬바람 부는  늦가을의 을씨년스러움 같은 허망한 외로움 때문에 쌉싸름한 가슴의 통증을 안겨주기도 한다. 차라리 이런 경험들은 시작하지 않는게 더 나은 것 아닐까 하며 무엇 때문에 떨치지 못하고 또 만남을 가졌을까 되새기게 된다.

을 먹는 친구들은 알콜의 힘을 빌어 백의 하나쯤 빙산의 일각처럼

내면의 솔직한 욕구와 감정들을 슬쩍 내밀었다가는 황급히 서로의 묵인하에 다시 챙겨간다.

그나마 꺽어진 백살이라는 세월의 힘에 의지하여 함부로 내미는 듯 보이지만  역시 치밀하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으나 

무척 조심스럽고 소심하다.

어머니 뱃속에서 처음 나왔을 때의 비슷비슷한 알몸이 아닌

날실과 씨실이 저마다 다른 삶의 옷들을 다르게 걸쳐 입어서 일까?

아직은 때가 아니어서 일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가, 도대체....

50, 60 살이 되면 성숙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더니...

언어와 몸짓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세월만큼 필요한 것들이 많아져 사춘기 때처럼 여전히

부족하고 답답하고 어리석고 겉돌고...

 

특히 부모님의 희생으로 어지간한 가방끈을 가진  우리들은

의미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목숨 걸어 삶을 자꾸 분화 또 분화....

세 끼 밥으론 도저히 채우지 못하는 복잡한 그래서 불행한 습성에 빠져

도저히 탈출하는 방법을 알지못하는 불쌍한 먹물들인지도 모른다.

 

그럼 포기할까?

세상과 소통하고픈, 태어날 때 부터 불행하게도 군락을 이루어야 배가 부른 정신을 가져버린

슬픈 짐승인 우리 인간들끼리

솔로몬이 절규했던 것처럼 헛되고 헛된 것이 헛되고도 헛되도다를 외치며

자신의 내면으로 달팽이처럼 몸을 말아쥐고 있으면 안전한 걸까?

 

다쳐도 상처가 나도 피를 흘리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 매끈한 온전함으로 남지 않고

경험과 추억과 실패와 실패에서 오는 깨달음, 잃은 것에서 찾아낸 작은 사금파리 한 조각에도

기쁨과 희망에 발열하는 체온이 있는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없기에

스마트 폰 문자로 인터넷 채팅으로 전화로 실제 만남으로

그리고 이렇게 말도 안되는

절규같은 낙서로 소통의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진실한

부끄럽지만 더욱 진실한

의사소통을 위하여

여자도 남자도 아닌 허세와 거짓의 옷을 벗어 던진

그저 한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비척거리며라도 마주 서 보면

조금은

덜 시릴까? 조금은 따뜻해질까?

사람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사이에 냉각되어 버린 온몸의 피돌기들이

다시 꿈틀거리며 아지랑이를 피우며

녹아들수 있을까?

그런 희망을 가져도 될까?

친구들을 기웃거리며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는 내 영혼이 동그란 완전체가 되어 데굴데굴 신나가 굴러갈 수가 있을까?

 

동창회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들어오면 언제나 느껴지는

이 묘한 감정들

내가 살아온 날들만큼 함께 했던 친구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투영되는 나와의 동일시 때문에 포기가 안되는 건지

삶에 지친 피곤함을 동창들과 씻어내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다른 모임들과 달리 소통의 욕구에 대한 기대수준이 내려가지 않는 것 때문인지

분석은 정확하지 않으나 아마도 이모든 것들의 총체적인 감정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과자 하나에도 공깃돌 하나에도 모든 게 충분했던 어릴적 그 충만한 마음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욕심을 오늘도 포기하지 못한다.

 

 

2008년 11월 5일 희전부침개라 이름 지어준 "이구하나"정모를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