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밭/산 문

<편지글> 당진시입협회 회장님께

길길어멈 2010. 8. 13. 00:04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시 두 편을 보냅니다. 내 고향 당진을 위하여 이처럼 애를 쓰시는 문인이 있음에 자랑스럽고 고마운 마음 가득합니다. 국민 학교 입학을 위해 일곱 살에 당진을 떠나 왔지만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방학하는 그 다음날로 당진으로 달려가 개학 전날에야 억지로 인천에 오곤 했던 철부지 소녀가 돗자리 깔린 여객선 바닥에 누워 뒹굴뒹굴 잠을 자거나 지루하다고 창가 한자락 해보라는 어르신들의 명령이 떨어지면 득달같이 일어나 당시 유행가를 불러 사탕이나 사이다, 오징어를 얻어먹던 부끄럼도 모르는 개구쟁이 소녀가 이제 반백을 바라보는 중년아주머니가 되었습니다. 국민 학교 5학년 때야 비로소 전기가 들어왔고 하루에 한 번 밖에 신작로 위로 버스가 지나가지 않던 깡 시골 이었기에 아마도 더욱 견고한 둥지를 가슴에 짓고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해대교가 뚫리면서 둘째 아이를 지금도 당진읍에 살고 계시는 시댁에 맡겨놓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왕복하면서 이제 당진이 달라지는 구나 철강회사 때문에 내가 맡은 학급의 아이들이 아빠의 직장을 따라 당진으로 전세를 얻어 전학을 가는 것을 보면서 이제 당진도 농수산물 외에 다른 공산품이 생산되는 곳으로 발전하는 구나 하는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굴을 따던 갯벌과 바위도, 저수지도 사라지고 이제는 아스팔트로 뒤덮힌 도로와 저층아파트로 여기가 정말 내가 자란 곳 인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보덕포 할아버지집도 너무나 많이 변했습니다.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산에 올라 앞을 내려다보면 저수지의 잔물결과 미루나무와 환한 햇살에 천국이 따로 없구나 싶었는데 이젠 메워진 저수지 위로 시커먼 연기가 오르는 굴뚝이 시야를 막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무척 답답해 하시겠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이래도 저래도 내 고향은 당진이고 나의 이름이 붙었던 재란이네가 비록 양파를 말리고 저장하는 양파의 집으로 변해버렸지만 아직 허물어 없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때로 두리번두리번 의도적으로 찾아도 재란네집이 안보여 서운하기도 하고 이제는 관광지가 되어버린 왜목이나 난지도에 가기 위해 가는 길에선 무심결에 재란네를 지나쳐 버리기도 하지만 마음속엔 유년의 모습 그대로 재란네집도, 벌판도, 저수지도, 수문통도, 나무도, 밭과 논도, 바다도 모두 남아 있습니다. 남아서 당진을 지켜주시는 여러 분들이 계시는 한

그것도 명징한 언어로 내고향을 증명할

아름다운 시인들이 계시는 한 제 영원한 고향 역시 생생하게 살아

고향을 가진 모든이의 가슴으로

전해질 것을 믿습니다. 당진시인협회의 모든 분들의 건승과 행운, 건강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2010년 8월 12일 오후 11시 인천에서 다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