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밭/시

겨울아, 부탁해

길길어멈 2010. 8. 21. 23:07

 

 





       

       겨울아, 부탁해        

                                  다원 손성란

       

      똑같은 수분이련만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싫은 사람 손길 같은 땀방울

      싫은 사람 눈길처럼 집요한 계절 


      지하세계에서의 긴 투쟁에

      다시는 어둠속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듯

      흐린 새벽 가로등 불빛마저 해의 비늘로 알고

      지치도록 목 놓아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눈치 없는 매미 녀석들 사랑해보려

      무던히도 참아주는 이 계절 

       

      그렇게 살찐 어깨를 있는 대로 다 내놓고

      그렇게 온 계절 내내 귀지 한 번 파지 않고

      부끄럼도 참고, 울컥 솟는 짜증도 참아가며

      다독다독 가을바람 기다렸는데


      심장 바닥까지 화끈거리는

      농익은 종기를 매달고도

      가만가만 귀뚜라미 기다렸는데 

                                                                                           누누가 내 가을바람 밀쳐내고 

      이런 한기를 밀어 넣은 거지?

      이건 반칙이야

      긴 소매 옷은 장롱 속에서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데

      기척도 없이 끼어드는 건

       

      참을성 없이 여름눈물 닦아냈다고

      매미들 승리의 함성 자장가 삼아

      낮잠 한번 못자고 서성였다고

      이러는 건 너무해.


      말했잖아, 

      여름 태양에 묶여 꼼짝도 못했었다고

      끈질긴 땀방울들이 온몸을 기어 다니며

      밤낮없이 치분대서 미칠 것 같았다고.

                                                                                            조조금만 참아주면 안 돼?

      내가 참은 것만큼 만

      온몸을 훑어 내리던

      싫은 사람 손길 같던 땀방울

      바람에 태워 날려 보낼 동안  만


      자, 봐!

      가을이 오려고 기웃거리고 있잖아.

      마지막 한 점 비늘까지 다 태우고 가려는

      저 태양의 뜨거운 심술 사이로

      조심조심 한 걸음씩 오고 있는 거

      너도 다 보고 있잖아.


      알아, 너 깔끔한 거

      미적거리는 태양의 잔열

      널 부러진 매미들 겉옷

      참기 힘들다는 거,


      그래도, 

      그래도 겨울아,

      가을이 오기 전에 앞서 달려오진 마.

       

      즐비한 여름 잔해 한 번에 날려버리고

      하얗게 순결한 세상을 만들고픈

      너의 마음과 똑같이


      가릴 건 가리고, 담백한 눈길로

      파랗게 높은 하늘 바라보면서

      온 몸에 가득한 습기를

      아주 천천히 말릴 수 있는

      그런 시간이 가을이란다.


      겨울아, 부탁해.

      가을이 오기 전에 먼저 오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따라 와 줘.

      긴 소매 옷이 단잠에서 깨어

      대문 밖으로 뛰어나갈 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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