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아, 부탁해
다원 손성란
똑같은 수분이련만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싫은 사람 손길 같은 땀방울
싫은 사람 눈길처럼 집요한 계절
지하세계에서의 긴 투쟁에
다시는 어둠속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듯
흐린 새벽 가로등 불빛마저 해의 비늘로 알고
지치도록 목 놓아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눈치 없는 매미 녀석들 사랑해보려
무던히도 참아주는 이 계절
그렇게 살찐 어깨를 있는 대로 다 내놓고
그렇게 온 계절 내내 귀지 한 번 파지 않고
부끄럼도 참고, 울컥 솟는 짜증도 참아가며
다독다독 가을바람 기다렸는데
심장 바닥까지 화끈거리는
농익은 종기를 매달고도
가만가만 귀뚜라미 기다렸는데
누누가 내 가을바람 밀쳐내고
이런 한기를 밀어 넣은 거지?
이건 반칙이야
긴 소매 옷은 장롱 속에서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데
기척도 없이 끼어드는 건
참을성 없이 여름눈물 닦아냈다고
매미들 승리의 함성 자장가 삼아
낮잠 한번 못자고 서성였다고
이러는 건 너무해.
말했잖아,
여름 태양에 묶여 꼼짝도 못했었다고
끈질긴 땀방울들이 온몸을 기어 다니며
밤낮없이 치분대서 미칠 것 같았다고.
조조금만 참아주면 안 돼?
내가 참은 것만큼 만
온몸을 훑어 내리던
싫은 사람 손길 같던 땀방울
바람에 태워 날려 보낼 동안 만
자, 봐!
가을이 오려고 기웃거리고 있잖아.
마지막 한 점 비늘까지 다 태우고 가려는
저 태양의 뜨거운 심술 사이로
조심조심 한 걸음씩 오고 있는 거
너도 다 보고 있잖아.
알아, 너 깔끔한 거
미적거리는 태양의 잔열
널 부러진 매미들 겉옷
참기 힘들다는 거,
그래도,
그래도 겨울아,
가을이 오기 전에 앞서 달려오진 마.
즐비한 여름 잔해 한 번에 날려버리고
하얗게 순결한 세상을 만들고픈
너의 마음과 똑같이
가릴 건 가리고, 담백한 눈길로
파랗게 높은 하늘 바라보면서
온 몸에 가득한 습기를
아주 천천히 말릴 수 있는
그런 시간이 가을이란다.
겨울아, 부탁해.
가을이 오기 전에 먼저 오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따라 와 줘.
긴 소매 옷이 단잠에서 깨어
대문 밖으로 뛰어나갈 때 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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