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死六臣) 묘....
조선 제6대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단종 3년(1455년),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하자, 이에 의분을 느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참혹한 죽음을 당한다.
단종(端宗)의 아버지는 文宗.. 할아버지는 世宗대왕이다. 1452년 世宗의 뒤를 이어 文宗이 즉위하지만 원래 병약하여 재위 2년만에 죽자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文宗은 황보인, 김종서 그리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세자의 보필을 유언으로 남긴다.
그러나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권람, 한명회 등과 함께 황보인, 김종서를 살해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단종은 이름뿐인 王이었다. 1455년 단종은 한명회 등의 강요에 더 견디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상왕(上王)이 된다.
1246년 사육신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모두 처형되고, 그 이듬해 상왕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며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 해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에서 서인 (庶人) 으로 강봉(降封)되었으며...마침내 10월 유배지 영월에서 죽임을 당한다.
세종대왕에게는 총 17명의 자식이 있었다. 첫째 아들은 文宗이 되나 병약하여 즉위 2년만에 죽는다. 둘째 아들이 바로 수양대군(세조)이다. 문종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셋째 아들이 유명한 안평대군이다.
조선 최고의 멋쟁이이었으며, 자신의 꿈 이야기를 안견에게 얘기하여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다. 그러나 형인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다. 네째 아들이 금성대군...후일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 兄인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다.
사육신묘는 1456년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다 순절(殉絶)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 등 육신(六臣)의 묘소이다.
사육신묘는 육신이 순절한 후 200여년이 지난 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지금 사육신묘가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 유씨지묘, 성씨지묘, 이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에 또하나의 묘가 있었다. 일찍 이 민간에서 이 묘소를 六臣墓라 일컫고, 뒷편에 있는 묘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의 묘라고 일러왔다.
그런데 숙종5년(1679)에 숙종이 노량진에 열무(閱武)하어 갔다가 유사(有司)에 명하여 육신묘를 봉식(封植)하였고, 1691년 9월에는 관원을 보내 육신묘에 제사를 지냈다. 이어 12월에는 육신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가 다시 내려졌다.
한편 숙종7년(1681)에는 사육신묘역에 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民節書院)이 세위지고, 1692년에는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그 뒤 정조6년(1782)에 이르러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민절서원은 대원군에 의하여 철폐되었고, 그 자리에는 1954년 서울市가 6角의 사육신묘비를 세웠다.
불사이군(不事二君) ....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그래서 불이문이다.
이 곳은 1977년~1978년에 걸쳐 정화사업이 이루어졌다. 이 때 正門인 불이문(不二門)과 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의절사(義節祠)가 세워졌다. 이 의절사 뒤에 일곱의 봉분(封墳)이 있는데, 1978년 선산(善山)에 있던 하위지의 묘를 옮기고, 유성원의 묘를 새로 꾸미면서 , 세조시절 공조판서와 도진무(都鎭撫)로 있으면서 단종복위운동을 벌였던 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가 추가로 꾸며졌다. 그리하여 의절사에는 사육신 여섯명이 아닌 일곱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김문기의 포함여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5공화국 시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김문기의 후손)가 권력의 힘으로 유응부 대신 김문기를 포함시키려 시도하였었다.
사당 안에 사육신의 위패를 모셨다. 원래 이 자리에는 숙종 7년(1681) 사육신의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세웠던 민절서원(民節書院)이 있었던 위치이다
사육신의 충성과 장렬한 義氣를 추모하고자 정조6년 (1782) 이 신도비를 세웠다.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世祖는 1456년 6월 5일 주모자의 처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1.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대역(大逆)과 모반(謨叛)은 수법과 종범(從犯)을 가릴 것 없이 공모자
는 모두 능지처사 (陵遲處死)할 것.
2. 그 아버지와 아들가운데 16살이 넘은 이는 모두 목 졸라 죽일것.
3. 그 아들중에서 15살이 안된 이와 그 어머니,딸,아내,첩,할아버지,손자,자매 그리고 아들의 아내
와 딸은 모두 공신(功臣)집에 주어 노비(奴婢)로 삼게 할 것.
4. 80살이 넘은 노인과 병을 앓아 곧 죽게 될 이와 여자로서 60살이 넘은 노파와 앓아서 사람 구실
을 못하게 된 이는 연좌제(連坐制)를 면제할 것.
5. 백부,숙부,형제들이 아들들은 삼천리 박으로 귀양보내어 안치시킬 것.
6. 연좌(連坐)된 사람으로서 동거(同居)하지 않은 이의 재산은 그대로 둘 것.
7. 딸 가운데 이미 혼처가 정해졌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의 양자로 들어 가거나, 남의 집 딸로서
시집을 오기로 되어 있으나, 아직 성례(成禮)를 하지 않은 이는 덤으로 연좌시키지 말 것.
박팽년의 묘..... 단종이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빼앗기자 박팽년은 경회루에 빠져 자살하려는 것을 성삼문이 말린다. 후일을 도모하자고... 결국 박팽년도 3족(할아버지.아버지,세형제)이 모두 처형을 당하고(남자 9명).... 여자들은 관노비 (官奴婢)가 된다.
1458년 사육신이 죽은 후 몇달이 지나, 경북 달성군 하빈면 사동..교동현감댁에서 아이가 연달아 태어난다. 하나는 박팽년의 손자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고, 또 하나는 그 댁의 노비가 딸을 낳았던 것이다. 그 손자며느리는 관노비가 되어 다행히 아버지인 교동현감에서 노비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사육신의 후손 중 아이를 낳아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관노비로 삼으라는 世祖의 지시가 있었다. 며느리는 고민 끝에 노비의 딸과 바꿔치기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박비(朴脾)라고 지어준다.
그 아들 박비가 장성하여 17세가 되었을 때는 成宗시절이었다. 주위에서 자수를 권하였지만, 박비는 성종에게 달려 가, 자신이 박팽년의 손자임을 밝힌다. 성종은 기뻐하여 일손(壹손)이라 이름도 하사하고 노비에서 풀어 준다. 이름 "일손"은 유일하게 하나 남은 옥구슬"이란 뜻이다. 이리하여 박팽년의 원손(原孫)이 이어지게 되었다. 순천 박씨이다.
박팽년은 수양대군을 도와 단종 폐위를 도와 준 신하들을 풍자하여 다음의 詩를 남긴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을 손 너뿐인가 하노라.....
김문기의 묘.... 단종 복위에 참여하였지만, 원래 사육신은 아니었다. 박정희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문교부에 주장하여 사육신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한다. 나도 기억난다. 금녕 김씨...김재규의 조상이다. 비석의 모습도 다르다. 추가로 포함되었기에....
유응부의 묘... 단종복위 운동의 주모자는 성삼문과 박팽년이다. 유응부는 무인(武人) 출신으로 행동 책임자이었다.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고, 世祖가 직접 심문한다. 세조(수양대군)에게 성삼문과 박팽년은 王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응부는 족하(足下... 같은 나이 또래 또는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라고 부르며, 끝까지 비아냥 대어 世祖의 화를 끝까지 돋은 인물이다.
세조 ---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
팽년 --- 明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자리에서 내가 칼 한자루로 족하를 죽이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간사한 놈(金質..밀고자)에게 고발 당하였으니 유응부는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족하는 나를 빨리 죽이시오........세조는 즉시 무사를 시켜 박팽년의 살가죽을 벗기고 , 다시 심문하였으나 유응부는 끝까지 자복하지 않고 오히려 성삼문을 향하여 소리 지른다.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그렇구나. 지난 번 내가 칼을 사용하려 히였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요" 하더니, 오늘의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구나 .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족하는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성삼문)에게 물어보라...
世祖는 더욱 화가 나서 불에 달군 쇠를 가져와서 그의 배 밑을 지지게하니 ,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유응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며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이개의 묘... 숙부가 세조와 친분이 두터워, 회유를 당하나 의연하게 거절하고 죽는다.
류성원의 묘
성품이 강직하여 대신(大臣)의 자제(子第)가 언관(言官)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단종 복위 모의가 탄로나자, 집에 돌아 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앞에서 의관을 갖춘 채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世祖가 보낸 군사가 찾아와 시신을 옮겨 다시 사지(四肢)를 찢기는 참혹한 처형을 당하였다.
성삼문(成三門)의 묘...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세번 물어 이름이 三門이 됐다고 한다. 함깨 단종 복위에 참여하였던 김질의 밀고로 발각이 되고 성삼문도 갖은 문초끝에 새남터에서 죽는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데...아버지, 세 동생, 네 아들 모두 죽는다. 남은 가족도 없고 누구도 무서워 시체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데.....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시체를 거두어 이 곳에 묻는다(정확하지는 않은 說이다). 이 때 성삼문의 나이 37세이었다.
그가 처형장에 끌려가면서 시를 남긴다. 절명시(絶命詩)이다.
격고최인명 (擊鼓催人命) 처형장의 북소리는 생명을 재촉하고
서풍일욕사 (西風日慾斜)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는구나
황천무객점 (黃泉無客店) 황천가는 길에는 주점도 없다는데
금야숙수가 (今夜宿誰家)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잠을 자볼까....
그리고 성삼문은 또 하나의 詩를 남기게 되는데... 1456년 6월 8일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끌려 갈 때, 여섯살된 그의 딸이 따라오며 울부짖으니, 그는 뒤돌아 보며 "사내 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 하고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수레가 잠시 머물렀을 때, 그의 下人이 울면서 술을 올리니 몸을 숙여 받아 마시고 그의 충절(忠節)을 다음과 같이 詩로 나타냈다.
식인지식의인의 (食人之食衣人衣) 님의 밥 님의 옷을 먹고 입으니
소지평생막유위 (素地平生莫有違)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수가 있으랴
일사고지충의재 (一死固知忠義在) 이 죽음이 충(忠)과 의(義)를 위함이기에
현릉송백몽의의 (顯陵松栢夢依依) 현릉(文宗의 능) 푸른 송백 꿈에서도 못 잊으리.
성삼문의 묘라고 알려진 곳이 세군데이다. 이 곳 노량진 사육신묘...충남 논산 그리고 그의 고향 충남 홍성군 노은리 (아버지 성승의 묘가 있다).... 이렇게 세군데이다. 충남 홍성에 있는 것은 아마 그의 부인이 유품을 거두어 위패와 함께 모신 것 같다. 그러면 논산의 그 것은 ?
일부 기록에 차이가 있지만 성삼문은 거열(車裂)의 극형을 받았다. 지금의 노량진 부근에서 네마리의 말이 읶는 수레에 팔다리를 각각 묶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벌을 거열(車裂)이라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세조는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하여 갈기갈기 찢긴 시신을 가지고 전국을 돌게 하였다. 아마 논산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시신 중 일부가 묻혀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성삼문이 38세로 죽어 시신은 갈기갈기 찢겨 전국으로 흩어지고 ,제사를 모실 자손도 없자, 그의 부인 김씨는 자신의 손으로 밤나무를 깎아 신주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부인도 죽자 , 외손되는 박주가 고향인 홍성에 단을 쌓아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홍성에 또하나의 성삼문묘가 있게된 연유이다. 홍성에는 성삼문의 부인과 그의 부모(成勝장군)의 묘가 초라하게 있다.
원래 이 곳에는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묘는 허묘(虛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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