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단(錦城壇)....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꾀하다.
1426년 3월 28일 世宗 8년.. 세종과 왕비(소현왕후)사이에서 왕자 이유(李喩)가 태어난다. 세종의 여섯번째 아들로 1433년 금성대군으로 봉해진다. 1437년, 세종은 제1차 王子의 亂때 죽은 방번과 방석의 후사를 잇게 하려고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입적시키는데..금성대군은 방석의 양자가 되어 그의 제사를 모시게 된다.
보통 같으면 금성대군도 평범한 王族으로 부족함없이 왕족으로 살아 갈 수 있었지만, 정국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의 兄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등을 죽이고 권력의 中心에 섰다. 수양은 모든 정적들을 죽이고 , 왕실 종친도 그의 백부인 양녕대군을 포함하여 대부분 수양대군을 지지하게 되지만...방석의 養子로 들어가 수양대군의 숙부가 된 금성대군은 수양에 맞설 宗親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당연히 수양대군도 금성대군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결국 1455년(단종 3년) 금성대군이 자기 집에서 활쏘기대회를 하였다는이유로 수양대군을 추종하는 신하들이 그를 모함하여 罪를 내리지만, 단종은 결국 그 죄를 풀어 주고만다. 그러나 정적 제거를 위한 수양대군 측은 이것으로 포기할 상황은 아니었다. 다른 종친들과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결국 금성대군은 경기도 삭녕으로 유배 당하고 만다.
이 사실은 수양대군의 최후통첩이나 마찬가지이었다. 더 이상 자신을 도와 줄 세력이 없음을 알게된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王位를 물려주고, 자신은 上王이 된다. 世祖가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세력들은 금성대군을 더욱 먼 곳으로 유배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세조는 처음에 그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압력은 더욱 强度를 높혀가고 있었으며...식량은 주되, 반찬은 주지 말라고 命을 내리더니, 마침내는 奴卑와 家産, 土地를 모두 몰수하고 만다. 그러다 세조 2년 2456년 사육신들에 의한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금성대군은 이 곳 경상도 순흥으로 안치(安置)당한다.
금성단. 소수서원.소수박물관. 선비촌. 순흥향교
그리고 그 이듬해 단종의 丈人 송현수가 역모죄로 제거되면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 당한다. 이 소식을 들은 금성대군은 , 어차피 자신이나 단종이나 남은 운명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擧事를 준비한다.
그는 순흥부사 이보흠을 半强制的으로 끌어들여 격문(激文)에 서명케 하는 동시에 그 외에도 지역의 인사들을 포섭한다. 순흥부의 군사를 이끌고 영천으로 간 후, 다시 자신의 기반이 있는 안동으로 가면, 병사 2,3000은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이를 기반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다는 것이 금성대군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事前에 누설되어 실패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순흥의 官奴가 벽장에 숨어 이를 엿 듣고는 금성대군의 시녀와 사귀어 격문을 훔친 후 이를 한양에 알리러 가는데.. 이를 눈치 챈 풍기현감이 뒤쫒아 이를 빼앗고 자신이 告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사(正史)인 세조실록의 기록은 다르다. 거사의 제보자가 순흥부사 이보흠으로 나오는 것이다. 모르겠다. 세조실록은 이미 승자의 기록인 것을...
거사가 실패하면서, 신하들은 그에게 사약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일단 세조는 거부한다.
그러나 결국 양녕대군 등 종친들까지 그리 주장하니 世祖는 그를 따라 사약을 내려 죽인다. 곧이어 단종의 장인 송현수도 죽이고, 이어서 단종에게도 사약을 내린다.
세조실록에는 " 단종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하니 예로서 장례를 치루어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은 사약을 받고, 엄흥도에 의하여 몰래 장례가 치루어졌지만...
순흥부사 이보흠의 末路도 비참하였다. 사육신의 밀고자 김질(金質)이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이보흠은 비록 반 강제적이었지만 격문에 서명한 죄로 유배 당하고, 의금부 도사에 의하여 교살된다.그리고 순흥부는 페지되어 인근 고을로 나누어져 통합 당하였다가 숙종때 다시 복구된다.
금성대군은 숙종,영조 때 단종이 복위되고, 그를 따르던 신하들이 복권되면서 함께 복권된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금성대군은 이 곳으로 부처(付處)를 당한다.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안치되어 있던 것인 것이다. 조선시대 형벌 중에서 유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부처(付處)와 안치(安置)가 있다. 부처(付處)는 그의 부인과 같이 생활하게 하던 제도인데, 안치(安置)는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예우하는 것이다. 유배를 당한 곳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안치(安置)의 종류에는 고향으로 住居를 제한시킨 본향안치(本鄕安置)...외로운 섬으로 행동을 제한 시킨 절도안치(絶島安置)와 위리안치(圍籬安置)가 있다.
위리안치는 가장 重罰에 속하는 것으로 ..큰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범죄현장이나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구덩이를 만든 후 죄인을 가둔다. 우물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고 감시인을 둔다. 刑이 확정되어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가두어 두는 일종의 미결수 구금장소인 것이다.
죽계제월교(竹溪齊月橋)....얘기거리가 참으로 많은 다리인데, 그만 놓쳤다. 시간에 �겨 다니다 보니...그리고 어디를 가려면 사전 정보의 획득이 매우 중요한 것인데..그 점도 부족하였다. 금성단 근처에 여러 관련 사적지가 많은데... 이 죽계제월교뿐만 아니라 금성대군이 위리안치(圍籬安置) 당하였던 곳... 사약을 받았던 곳...등등
언제 다음 기회에 꼭 가 볼 것이다. 직접 가보지도 않고, 남의 사진 인용하는 것이 매우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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