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보내드립니다
손 성 란
스며간 날에 대한 반추(反芻)로
당신 목은
학처럼, 기린처럼
길어만 지는데
영문모르는 성하(盛夏)의 꽃들은
깔깔거리며
흐드러집니다.
그래요.
꽃들의 깔깔거림을 들을 만큼
당신은 미련합니다.
외눈박이 황소 마냥
오직 한 길만을
묵묵히
그것도
마흔 세 해나
걸어왔으니까요.
꿈을 키우는 자가
시인이라면
당신은 릴케였고
마음의 더 깊은 소리를 듣는 자가
음악가라면
당신은 모차르트였지요.
당신 곁에 잠시만 머물러도
릴케의 섬세함과
모차르트의 화려한 영롱함이
뚝뚝 묻어납니다.
숲이 있고, 물이 있고
향기로운 꽃잎 날리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보일까봐, 탐이 날까봐
시인도 음악가도 마다하고
외눈박이 황소가 되었다며
숲처럼, 물처럼, 향기로운 꽃잎처럼
활짝 웃어버리던
바보 같은 당신 눈이
정말 소를 닮았습니다.
마흔 세 개의 어느 한 구비
땀과 정성과 사랑과 헌신이
배어있지 않은 곳이
있겠는지요.
허약하고 어린 생명만이 움트고 자라는
신비의 계곡에서
끝없이 울며 춤추던
당신의 성실과 겸손과 눈물과 기도가
이제 성장한 나무가 되어
거꾸로 다른 이들에게
긴 그늘을 만듭니다.
보십시오.
오늘,
바보 같은 당신의 황소 눈이 그리워
퍼줄 줄만 알던 당신의 우물 같은 사랑이 그리워
당신 곁에 되돌아온
울창하고 견고한 생명들을.
당신의 거름으로 성장한 생명들이
당신이 주셨던 눈물과 기도로
이 마흔 세 번째 고갯길을
배웅합니다.
그 어떤 천하장사보다도
그 어떤 웅변가보다도
마음의 힘을 북돋아주시고
침묵의 눈빛으로 희망을 말씀해 주셨으니
눈물 없이
기쁨의 환호성으로
이 고개에 마주섭니다.
오직 기쁨만으로
울퉁불퉁 넘어 온 힘겨운 길이었기에
욕심을 버려야 했던 인내의 길이었기에
더욱 아름다운 당신이
가슴 깊이 황혼을 호흡하고
고운 무지개를 마실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그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화장실 벽에 쓰인 아이들의 낙서 속에서
교정의 곳곳에 엉겨붙은 당신의 발자국 위에서
어깨를 토닥이며 ‘잘했어, 참 잘했어’ 속삭이던 격려의 기억 속에서
수없이 당신을 만나며
그리워할 수 있게 해주심에
또한 감사드립니다.
고단했지만
따사로운 햇살을 양어깨에 싣고
조용히 내려앉는
당신을 봅니다.
보이지 않는 물줄기가
당신의 가슴을 지나
우리들의 손금 하나 하나에까지도
흘러내립니다.
이제
보다 은밀하고 자유로우며
깊은 세계로
떠-나-시-는
당신을
이렇게 기쁨으로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이름도 아닌
자랑스런 우리들의 선생님!
그 선생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불러봅니다.
선생님.
이천년 팔월 스무 닷새
손 성 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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