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과 함께 여는 구비문학 고전문학 세상/ 우리 옛이야기
* 세계민담전집 1 한국편(신동흔, 황금가지)에 수록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는 60여편의 민담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동물신부 이야기, 선비와 구렁각시 선비와 구렁각시
옛날에 시골 마을에 어떤 선비 하나가 살고 있었다. 글을 많이 읽어 삼강오륜 인의예지를 다 익히기는 했는데, 살기가 무척 어려웠다. 벼슬을 못하여 녹을 받지 못하는데다가 배운 게 글 읽는 일 뿐이라 농사든 장사든 아무 것도 하지를 못하니 살림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다 떨어지니 얻어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때 함께 글을 배운 친구 하나가 과거에 급제해서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언젠가 선비한테 한 말이 있었다. “살기 어렵거든 우리 집에 찾아와서 쌀이라도 갖다 먹고 하게나.” 가난한 선비는 온 식구가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자 그 한 마디 말을 떠올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구를 찾아서 한양으로 길을 나섰다. 짚신을 신고 한양까지 걸어서 가려니 몇날 며칠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쉬지 않고 간다고 가다 보니 어느 날 인가도 없는 산 속에서 날이 저물고 말았다. ‘아이쿠 이거 큰일났구나!’ 사방은 깜깜한데 어디서 짐승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혼이 다 나갈 지경이 되어 한참을 헤매고 있는데 멀리서 불빛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정신없이 어둠을 헤치고서 찾아가 보니 뜻밖에도 솟을대문이 솟아있는 덩그런 기와집이었다.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부르자 듣도 보도 못한 천하절색의 젊은 여인이 나왔다. “웬 선비 양반이 이 밤중에 웬 일이신가요?“ 선비는 사정 얘기를 하면서 하룻밤 묵어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집에 저 혼자뿐이니 어쩔까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밤중에 다른 데를 가시지도 못할테니 모실 수밖에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안으로 안내해서 방을 정해주더니, 조금 있다가 저녁상을 차려왔다. “시장하실테니 좀 드세요.” 그런데 음식을 차린 것을 보니 태어나서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진귀한 음식이 가득했다. ‘이상하군. 이 산 속에서 어찌 이런 진수성찬을!’ 의심이 갔지만 워낙 배가 고팠던지라 앞뒤 가릴 틈이 없었다. 정신없이 밥 한 상을 다 먹고 나서야 숨을 돌리고서 여인한테 물었다. “부인 혼자 계신 집에서 이리 대접을 받으니 송구합니다. 그런데 어찌 이 산 속에 혼자 계시는지요?“ “자식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서방이 돌아가시니 세상만사가 다 싫어져서 그냥 산 속으로 숨어들었답니다.“ 그러면서 후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다음날 선비가 길을 떠나려고 하니 여인이 소매를 붙잡았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어렵게 찾아오신 터인데 하루만 더 쉬다가 가시지요. 어째 영 보내기가 싫습니다.” 젊고 예쁜 여인이 그렇게 간절히 만류하자 선비는 그만 마음이 동해서 갈 길도 잊고서 그 집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루 종일 편안히 쉬면서 진수성찬을 대접받고는 밤이 되어 한 이불 속에 들어가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한번 그렇게 정을 나누고 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하루 이틀 더 묵는다는 게 어느 새 달포가 지나고 말았다. 선비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 큰일났구나. 우리 집 식구들이 다 굶어죽게 되지 않았는가. 정신을 차려야 해.’ 선비가 여인한테 이제 그만 길을 떠나겠다고 하니 여인이 벌써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했다. “아무 걱정 말고 더 쉬다 가세요. 선비님 댁에 벌써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보내 두었답니다.” “아니, 그게 사실이오?” “사실이고 말고요.” 그러자 선비는 떠나려던 결심이 사르르 풀어져서 그냥 그 집에 머무는 것이었다. 다시 갖은 대접을 받으며 즐거운 날을 보내다 보니 또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이참에 집에 다녀올테니 보내주구려. 내 꼭 다시 오리다.” 그러자 여인은 선선히 선비를 놓아주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꼭 오셔야만 합니다.” 여인은 노자는 물론이고 말까지 한 필 내주고는 집밖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주었다. 선비가 본가에 당도하자 아내와 자식들이 뛰어나와서 반갑게 맞이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친구를 두었길래 이렇게 금은보화를 많이 보냈는지요. 평생을 먹고살 수 있겠어요.” “아 그럼 내 친구인데 오죽할까!” 이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그 재물은 여인이 보내준 것이 분명했다. ‘세상에 덕을 봐도 이렇게 단단히 볼 수가 있나!’ 선비가 집에서 두어 달을 묵다 보니 자꾸만 그 예쁜 여인이 생각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사람의 도리로 보더라도 가서 인사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이렇게 그럴싸한 명분까지 만든 선비는 여인을 찾아서 길을 떠났다. 선비가 부지런히 길을 재촉해서 여인이 사는 집이 보일락말락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선비가 여인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서 뛰듯이 가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보게,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내 말을 들어보게.” 선비가 놀라서 돌아보니 백발이 성성한 어떤 노인 하나가 오동나무 밑에서 자기를 부르고 있었다. “노인장은 뉘십니까?” “내 말을 잘 듣게나. 나로 말하면 하늘 나라에 계신 자네 선친의 친구로세. 그분 부탁으로 이렇게 온 거야. 어떤가, 자네 지금 웬 여자를 찾아가는 길이 아닌가?” 선비가 머뭇거리면서, “그렇습니다만……” “자네 아주 큰일 날 뻔했어. 그렇게 모른단 말인가?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요귀야. 천년 묵은 구렁이가 둔갑한 거란 말일세. 지금 자네가 가면 잡아먹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이야. 용이 돼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말이지.” “……” “믿기지 않거든 내 하라는 대로 해보게. 그 집에 당도하거든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살짝 뒷담을 넘어 들어가 방안을 엿보란 말이야. 그러면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될거야.” “……?” “자네가 사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야. 다시 대문으로 해서 들어가면 구렁이가 여자로 변해서 맞이하고 밥상을 차려올걸세. 그러면 밥을 한 술 떠서 입에 물었다가 삼키지를 말고 여자를 향해 확 뱉어버리라구. 그렇게 해야면 죽음을 면할 수 있어. 명심하게.” 그렇게 말을 던져놓은 채 백발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인의 집에 당도한 선비는 문 앞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집 뒤로 돌아가 담을 타 넘었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구멍을 뚫고서 안을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간데 없고 커다란 구렁이가 굼실굼실 서려 있는 것이었다. 선비는 그만 오금이 다 저려 왔지만,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는 다시 담을 넘어 대문으로 와서 문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전날과 다름없이 그 여인이 선비의 손을 부여잡으면서 반갑게 맞이했다. “오셨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선비가 방에 앉아 기다리자니 여인이 전날처럼 진수성찬을 차려서 내와서는 분길 같은 손으로 선비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자,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집어넣은 선비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걸 뱉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뱉으면 나는 살고 저 여자는 죽겠지. 그러나 따져보면 저 여인 덕에 내가 갖은 호강을 다 누려 보고 굶어죽을 지경에 있던 우리 가족이 잘 살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고. 아, 나는 어째야 하지?’ 선비는 눈을 들어서 여인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밥을 꼭꼭 씹어서 목구멍으로 꿀떡 삼켰다. 그렇게 밥 한 그릇을 남김없이 다 비웠다. 그러자 여인이 선비의 손을 덥석 움켜쥐는 것이었다. “선비님, 어찌 그 밥을 내게 뱉지 않으셨단 말씀입니까?” 선비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그 일을 알고 있었단 말이오?” “알다뿐이겠습니까. 알아도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러면서 신기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선비님이 만난 그 백발노인은 천년 묵은 지네랍니다. 이 골짜기에 나와 함께 살고 있는데 우리 둘 중에 하나만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는 운명이었지요. 제가 이번에 선비님의 마음을 얻으면 용이 돼서 올라가게 되는지라 그 일을 방해하려고 그렇게 나타났던 것이랍니다. 이제 저는 선비님 덕택에 용이 되어 승천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여인은 감격에 겨워서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리 된 일이군요. 나는 그간에 입은 은혜가 과한지라 차라리 나 혼자 죽고 말자고 작정했었다오.” “죽기는 왜 죽는답니까. 만약 선비님이 저한테 밥을 뱉었다면 오히려 해를 당했겠지요. 천년을 기다린 일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판이니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이제 다 잘 되었으니 걱정 마세요. 자, 저는 이제 떠나갑니다. 길이 평안하세요.” 그 말과 함께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천지가 진동하니 선비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와집은 온데간데없고 바위 위에 누워있는 참이었다. 놀라서 주변을 살펴보니 큰 바위 밑에 구렁이가 용이 되기 위해 도를 닦던 터가 눈에 띄었다. “이게 정녕 꿈은 아니었구나.” 선비는 집으로 돌아온 뒤로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려서 재산도 불어나고 벼슬길도 열려서 평생을 편안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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