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정(假定)은 없지만...단종의 비극은 女福이 없었던 아버지 文宗으로부터..
文宗(1414~1452)...그는 世宗의 맏아들이었다. 8살되던 해에 世子로 책봉되었으며, 그 후 1450년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20년동안 세종을 충실히, 훌륭히 보필하였다. 그는 아버지 世宗만큼이나 학문을 좋아하고, 人品이 관후하여 天文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兵法에도 밝아 요즈음 영화로도 나온 신기전(神機箭)을 직접 설계하여,이를 文宗火車라고도 부르고 있다.
文宗의 여인들
文宗의 世子 시절인 1427년..14살이 되던 해에 그는 18살의 金氏와 결혼을 한다. 김씨집안은 원래 평범한 가문이었지만, 그 집안의 딸이 太宗의 後宮으로 들어가면서 권문세족이 된다.
결혼하고, 김씨는 文宗이 자신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효동과 덕금 두 궁녀(宮女)에게만 사랑을 기울이자, 侍女인 호초에게 남편으로부터 사랑받는 術法을 알아오도록 재촉하였다. 당시 유행하였던 소위 압승술(壓勝術)이었다. 압승술은 음양가에서 쓰는 비술(秘術)로, 남을 저주하거나 사랑을 얻기 위하여 각종 비책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호초는 사랑받는 女人의 신발을 불에 태운 다음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男子에게 마시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비책을 김씨에 알려준다. 그러나 찾지도 않는 文宗에게 그 방법을 사용해 볼 수도 없었던 김씨는 다시 호초를 다그쳤다. 이에 호초는 여기저기 물어서...교접하는 뱀에게서 흘러나온 애액을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다니면 남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제2의 압승술을 권한다.
이런 사실을 김씨의 다른 侍女 순덕이 世宗에게 말하였고, 세종은 진노하여 호초를 처형하고, 곧이어 김씨를 폐빈(廢嬪)시키고 궁궐밖으로 내 쫒았다. 그 아버지 김오덕은 김씨를 자결케 하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신기전
그리고 3개월 후, 世子는 봉씨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된다. 아버지 봉여는 司憲府 감찰을 지낸 중하위직 관리이었지만, 그후 출세가도를 달린다. 世宗은 장차 국구(國舅..임금의 장인)로서 대우는 하되, 중요한 직책은 맡기지 않는다.
그러나 세자와 봉씨의 결혼도 역시 不幸의 연속이었다. 봉씨와의 사이에서 후손이 없자, 이를 걱정한 世宗은 신하들과 의논하고 승휘 3人을 들였다. 승휘(承徽)란 임금의 후궁에 해당하는 세자의 妾이었다. 그 중 승휘 권씨가 임신을 하자 세자빈 김씨의 원망은 극에 달한다.
먼저 봉씨는 임신하였다고 거짓을 얘기하며 거처를 왕비가 머무는 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한달이 지나자 갑자기 유산(流産)을 하였다고 말했다. " 단단한 물건이 나왔는데, 지금 이불속에 있다." 世宗이 늙은 上宮을 시켜 확인해보자, 이불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봉씨의 동성애(同性愛)이었다. 봉씨는 여종 소쌍을 사랑했다. 봉씨는 소쌍이 승휘 권씨의 몸종인 단지와 친하게 지내자 그것조차 질투하였다. 이 정도되니 궐내에 소문이 파다하였고, 世宗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세종은 소쌍을 불러 다그쳤다. 소쌍은 " 지난 동짓날, 세자빈께서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마지못해 옷을 반쯤 벗고 누웠더니 嬪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벗기고 강제로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희롱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당시 이런 同性愛는 궐내의 궁녀와 시녀들 사이에 유행하였었고, 世宗은 그래서 금지령을 선포하고, 어긴 자에게 곤장 100대를 치는 벌을 내리기도 하였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빈이 동성애를 하였던 것이다.
世宗은 세자빈을 불렀다. 봉씨는 딱 잡아 떼었다. 자신은 동숙한 적이 없고, 다만 소쌍과 단지가 "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낮없이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아댔다. "고 듣기 민망한 말까지 스스럼없이 하였다. 世宗은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고 물었다. 자신이 한 짓을 단지가 한 것인냥 둘러대는 것을 세종이 모를 리 없었다. 그날로 봉씨는 폐빈되어 궐밖으로 쫒겨났다. 결국 봉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하들을 볼 면목이 없어진 世宗은 봉씨를 내쫒은지 열흘쯤 뒤인 11월7일, 그럴 수 밖에 없언던 이유를 소상하게 다시 얘기한다.
글을 아는 여성으로 하여금 봉씨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러나 봉씨는 어명임에도 불구하고 며칠만에 못 배우겠다고 책을 뜰에다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내가 어렵사리 설득하여 世子가 봉씨를 찾도록 하였는데, 봉씨는 매일 밤 세자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봉씨는 술을 매우 즐겨 방 안에 술을 항상 준비해두고 늘상 큰그릇으로 취하도록 마셨다. 그리고 여종들로 하여금 남성을 사모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아버지 붕여가 죽어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자, 봉씨는 그 술을 어머니집으로 보내어 그 곳에서 마셨다. 世子가 이를 금지하자 다시 그 술을 다 갖고와서 자기가 다 마셔버렸다............
봉씨는 시골여자이었다. 게다가 조선 初의 여성은 사실 高麗의 여성이었다. 자유분방할 수 밖에 없었다. 궁궐 내에 女姓의 同姓愛가 만연하였던 것도 고려의 문화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쯤에서 역사의 가정(假定)이 시작된다.
봉씨거 쫒겨 나간지 두달만인 12월...3인의 승휘(承徽)중에서 행실이 뛰어났던 권씨가 새로운 세자빈이 되었다. 세번째이었다. 세자와 권씨의 금실은 좋았고, 5년후인 1441년 권씨는 아들을 낳아 세종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바로 단종이다. 그러나 權氏는 바로 다음 날 출산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왕비에 오르지도 못한다.
만일 文宗이 김씨나 봉씨와 사이가 좋아 아들을 낳았다면 이후 역사의 전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단종이 13살에 수양대군에게 쫒겨 나가는데....만약 文宗이 김씨나 봉씨와 사이가 좋아 아들을 낳았다면 20살 전후....수양대군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수양대군 .. 단종을 죽이기 전에, 그 아버지 문종을 먼저 죽였다 ??
요즈음 한의학자들은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文宗 역시 수양대군이 죽인 것이라고........
문종이 죽게된 큰 이유는 종기(腫氣)이었다. 그러나 당시 의관(醫官) 전순의(全循義)는 오히려 종기에 해로운 처방만을 내리고, 해로운 음식을 권하였다고 한다.
평소 몸이 약하여 文宗이 일찍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를 노린 수양대군의 사주를 받은 의관(醫官) 전순의 (全循義)가 이에 동조하였다는 추측이 가능한 것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전순의와 수양대군의 행적에서 짐작할 수 있다.
수양대군이 즉위한 후, 별다른 功도 없는 전순의가 일등공신으로 첵봉이 되며, 그 후에도 승승장구 벼슬이 정2품에 이른다. 賤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원래 王이 죽으면 그 왕을 치료하던 의관은 탄핵, 강등되거나 사형된다.
文宗이 죽고 전순의에 대한 탄핵 상소(上訴)가 연일 뒤따라도 世祖는 모두 모른 척한다. 도리어 벼슬을 높여주고, 사육신의 재산을 몰수하여 전순의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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