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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을 대신할 방법을 고민합니다

길길어멈 2010. 3. 18. 02:21

체벌을 대신할 방법을 고민합니다



������글쓴이 : 송승훈 (광동종합고등학교 교사)������


                                                                                                                                                                                                                                                    



 - 내용 -


1. 체벌을 둘러싼 풍경

1-1. 학교 바깥 풍경

1-2. 학교 안 풍경


2. 내 몸을 되돌아보며 : 폭력의 기억, 새겨짐


3. 어디서 체벌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는가

3-1. 학생에게 모욕당한다고 느낄 때

3-2. 교육을 인간관리라고 보는 관점에서

3-3.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일깨운다는 생각에서


4. 체벌을 대체해서 해볼 만한 시도들

4-1. 몸을 움직이는 일

4-2. 학습과 관련해서 

4-3. 교사와 학생이 서로 교감하는 일

4-4. 그밖에


5. 체벌에 대한 잘못된 대안들

5-1. 때리는 것보다 더 학생들을 꽉 잡을 수 있어요! : 빽빽이

5-2. 이렇게 감동이 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 반성문 쓰기

5-3. 학교판 박정희 향수? : 해병대 체력단련

5-4. 이거 체벌을 대체한다는 제도 맞아요? : 벌점제도


6. 글을 마치면서 : 남은 이야기

6-1. 현상을 보고 욕하는 것 당연하지만 원인을 살펴달라

6-2. 최고의 의술이란 병이 안 생기게 하는 것

6-3. 폭력에 주눅든 학생은 나-당신-우리 사회 전체다






세상에는 우리들이 더 미워해야 할 잘못과

스스로 뉘우침 없는 내 자신과

커다란 잘못에는 숫제 눈을 감으면서

처벌받지 않아도 될 작은 잘못에만

무섭도록 단호해지는 우리들

- 김명인, 「동두천5」,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 체벌을 둘러싼 풍경

1-1. 학교 바깥 풍경

어느날 잠에서 깨어 눈을 떠보니, 교사가 학생을 너무 심하게 때렸다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했다. 가르쳐달라고 학교 보냈지. 매맞고 오라고 학교 보냈나. 교사는 합법적 폭력배다. 이 멍든 자국 좀 봐라. 한참을 그러더니 갑자기 학생이 교사를 때려버렸다는 소리가 다음에 들려왔다. 막가는 세상이네.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이제 어쩔거나.

언론에 며칠에 한번씩 교사와 학생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며 폭력의 가해자로 계속 등장하니, 보통 사람들은 뭐가 뭔지 헷갈린다. 이거 선생이 문제야? 애들이 문제야? 요새 왜 이래 이거, 하고 탄식이라도 할 법하다.

체벌 문제로 사회가 떠들썩하더니 어느날 체벌이 법으로 금지되었단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국회의원 여럿이 교육적 체벌은 허용해야 한다고 서명을 했단다. 참 어지럽다. 한쪽에서 아우성친다.

“체벌을 없애면, 교사의 권위가 위태로워진다아~”

다른쪽에서 받아친다.

“그러면 때릴 권한만 주면 교사의 권위가 살아난다는 말이냐?”



1-2. 학교 안 풍경

말썽장이여서 가끔 학교를 빼먹기도 하지만 총각이라고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던 지○이. 지○이는 지금 얼굴을 감싸고 내 옆에 서 있다. 얼굴이 넙적한 선생님께 앞머리를 쥐여서 끌려갔다가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맞고 튕겨나갔다가 또 끌려와서 또 맞고 튕겨나간다. 자기가 잘 따르던 남자 선생님 옆에서 계속 맞는 모습을 보일려니, 맞아서 아프기도 아프지만 마음은 더 아프다. 그 여학생이 모멸감을 느끼게 머리를 여러 차례 맞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에서 늦게 나왔다고, 그전에 술 사러 나갔다가 걸린 것까지 합쳐서 혼나는 아이들. 반 전체 아이들이 엎드린 채 담임 선생님에게 걷어차인다. 나중에 양호 선생님이 아이들 상처를 보고 눈물 흘리고, 그 옆반 부담임이던 나는 다음날 경주 어느 또 무슨 유적인가를 가는데 버스에서 그 반 아이들이 안 내려서 곁에 있는 아이에게 물어보다가 기겁을 한다. 왜 그러냐는 내 물음에 다리를 절면서 나를 따라오며 이야기 나누던 그 학생은 “모두 어제 저녁 발에 걷어차여서 아파서 버스에서 못 내려요. 저도 그래서 절룩거리는 거예요.”

무서운 담임 교사 아래서 늘 겁먹어 지내는 학생들이 쓰는 언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짜증내는 언어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가치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이 갖는 언어는 풍자의 언어다. 곳곳에 날이 서 있는 말. 앞에서 아무 말 못하고, 뒤에서 상대를 완전히 씹어버리는 말. 건설의 전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공격의 말. 저주의 말. 널부러짐의 말. 자유가 없으니 책임도 없다. 단지 벌이 무서울 뿐. 그러기에 때리지 않는 교사는 우리에게 그간 쌓인 피로를 풀 대상이다. 열린 교사는 힘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닫아버린 문 앞에서 당황한다.

기죽은 교사들. 누가 봐도 교육적 체벌이 아닌, 폭력의 체벌을 행사하는 교사들은 요즘 좀 기죽어지낸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 때리면 큰일난다고 떠들어대는 턱에 그렇다. 학생들이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까지 한다니, 참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교육부장관도 인상이 보통 아닌데, 이런 차에 한번 걸리고 큰코 다치겠구나 싶다. 내 눈앞에서 저 버르장머리없는 애들놈들을 다 때려잡고 싶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잠시 참아본다. 한쪽 귀퉁이에서 웅숭거리던 저 전교조 무리들도 합법화되었다고 아주 기가 살아서, 애들을 좀 때리면 내놓고 눈치를 팍팍 준다. 아~옛날이여. 어디 두고보자. 이 분위기가 얼마나 갈는지.




2. 내 몸을 되돌아보며 : 폭력의 기억, 새겨짐

내 교단 첫인상은 교생 때 기억이다. 그때 나는 내가 나오고 동생이 다니는 그야말로 모교인 동대부고로 교육실습을 나갔는데, 순간순간 ‘이건 개집이야, 개집’ 하고 중얼거렸다. 저렇게 함부로 맞고 채이면서 어떻게 선생 턱을 돌려버리지 않을까 하고 신기해했다. 어느 한 교생이 4.19를 가르쳤다고 다음날 교생들이 머무는 교실 칠판 위에 빨간 분필로 ‘쓸데없는 것 가르치지 마라’고 적혀 있기까지 해서 교생들은 모두 늘 숨막혀 했다.

군에서 나는 내 바로 위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보인 적대감에 꽤 심란해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고 내 바로 밑으로 두 명이 들어왔다. 어느 순간 내 전투화 신은 발이 내 아래 병사의 엉덩이에 가 닿아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내게 굴종해주기를 바라고 있던 것이다. 그뒤로 그 장면이 머리에 남아서 나를 흔들어댔다. 남이 나를 괴롭힐 때는,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저쪽이 문제가 있고 내 쪽은 문제가 없다고 여겨져서 마음이 편했는데, 내가 남을 때리는 순간 나는 폭력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 그뒤로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내 안에서 솟구치는 다음 주문에 시달렸다.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래. 원래 사람이 다 그런 거야. 뭘 위해 뭘 노력해. 여기를 벗어날 수 없는데.”

교사인 내 손에 왜 까닭없이 힘이 들어가지? 왜 별 이유도 아닌데, 쟤를 한 대 때리고 싶지? 괜히 분한 마음이 솟아나니까 등에서는 식은땀이 배어난다. 돌아보면, 나는 꾸준히 맞으며 자라왔다. 초등학교 때 연습종이를 안 가져왔다고 뺨을 네 대나 맞고 눈물 글썽거린 일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때는 하루라도 안 맞으면 몸이 근질거려서 어색해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동아리 선배들에게 각목을 경험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늘 공권력에 학대당하는 친구들을 보고 지냈다.

몸에 배인 폭력, 이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돌아보면, 학교에서 행사되는 폭력은 학교 바깥 사회 분위기와 적지 않게 연관되어 있다. 70년대 학교는 선배들이 후배를 때리고 군기 잡는 것을 방조하면서 은근히 격려한 분위기다. 90년대에 와서 권위주의 사회가 얼마만큼 청산되자, 이제 학교도 그 자유의 바람이 분다. 3년이 안 된 교사는 직원회의 때 발언하지 말라고 ‘아직도’ 윽박지르는 수직적 교무실 문화는 ‘폭력의 문화화’라고 이름붙일 만하다. 우리의 몸은 모두 오염되어 있다.




3. 어디서 체벌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는가

어쨌든 지금 학교에서 폭력적 체벌은 줄어드는 분위기다. 사회에서 하도 이 문제를 갖고 시끄럽게 하니까 그렇다. 그러나 이게 진정한 해결방식은 아니다. 교사가 수준이 높아져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권력으로 모순을 내리눌렀기에 그렇다. 교사 집단 스스로 문화를 바꾸어나가서 극복한 게 아니기에, 지금 체벌은 해결의 길에 접어든 게 아니다. 단지 잠복기에 들어갔을 뿐이다. 조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든 다시 발병할 수 있다.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이해와 창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낡은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파괴와 창조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체벌이 왜 생기는지를 따져본다.


3-1. 학생에게 모욕당한다고 느낄 때 :

교사가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학생이 했을 때, 교사가 자존심을 상해하며 감정이 섞여서 이루어지는 체벌이다. 보통 인간적 감정의 문제여서, 누구나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울컥 하는 심정이 원인이다.

문제가 심각한 경우도 있는데, 이런 흥분이 일상화되어 나타나는 교사가 그에 해당한다. 이런 교사는 까뮈가 쓴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과 닮아 있다. 햇살에 눈이 부시자 기분이 이상해져서 사람을 총을 쏴죽인 뫼르소처럼, 그냥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학생을 아무 의식없이 툭툭 가볍게 치기도 하고, 때로 힘주어 때리기도 한다.

이 경우에 대안은 첫째, ‘일상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풀어가는 기술에 있다. 교사와 학생 사이도 일단 하나의 인간관계라 여기면 편하다. 선생님이 앞에 있던 말던 빽빽 소리지르며 짜증내고 인상쓰는 아이들이라고 개탄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가정교육이 다 깨져버려서 그렇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당장 교사의 눈앞에 있는 아이들을 보고,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그래’ 하고 말하는 것은 무력할 따름이다.

한탄하는 대신에, 나는, 내가 교사로서 학생에게 지킬 예의를 깍듯이 지킬 테니, 학생인 너희들도 사람이 사람에게 기본으로 지킬 예의를 교사인 나에게 지키라고 이야기한다. 내 앞에서 나보다 먼저 인상 쓰지 말고, 나보다 먼저 큰소리 내지 말고, 대화를 시도하기 이전에 짜증 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네 앞에서 건들거리지 않으니 너도 내 앞에서 바로 서 주기를 바란다며, 이래야 사람과 사람이 기분좋게 만날 수 있지 않겠냐고 이야기하면, 학생들의 행동이 눈에 띄게 바로잡혀서, 감정적 체벌을 할 기회가 많이 줄어든다.

두번째 대안은 상황을 ‘객관’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그 학생은 별 생각 없이 어떻게 하다 보니 무심코 나온 몸짓인데, 교사가 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때는 체벌의 충동을 넘어서 폭행의 충동까지 생겨난다. 돌발상황을 예방할 수 있게 이런 학생들의 유형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 주로 어떤 때 교사는 감정적 체벌을 하는가

잘못을 지적했더니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학생

뒤에 나가 있으라 했더니 나가면서 욕을 하는 학생

수업시간에 소형오락기를 갖고 놀길래 갖고 나오랬더니 인상만 쓰고 앉아 있는 학생

잠자는 걸 깨웠더니 ‘에이~씨’ 하고 짜증을 내는 학생

산만한 행동을 지적했는데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무시하면서 계속 떠드는 학생

잘못을 지적하며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데 팔을 휘두르며 신경질을 내는 학생

지적되어 불려나왔는데 건들거리면서 교사를 비웃듯이 바라보는 학생


“쟤가 왜 저러나”

“어떻게 저 자신이 잘못하고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하고 흥분하지 말고, 이런 일이 대한민국 어느 교실에서든 흔히 일어나는 상황임을 교사가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면 한순간 발끈 하고 폭발하는 감정에 교사가 객관적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고로 이어지기 쉬운 충동적 체벌을 상당수 줄일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감정적 체벌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렇듯, 인간관계를 푸는 기술(The Art of Love)에 그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교사와 학생이 있을 때, 그 관계를 지혜로 풀어가는 일은 교사의 몫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사람에 대한 섣부르지 않은 이해와 꾸준한 마음 공부가 필요하다. 克己復禮, 자기 안의 충동적 자아를 이겨야 공동체 윤리가 죽지 않는다!


3-2. 교육을 인간관리라고 보는 관점에서

인간을 동물과 비슷한 무질서한 존재로 보고, 그런 인간을 통제·관리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정해진 통지표의 길 바깥으로 나가는 행동을 모두 ‘비정상’으로 보기에, 이 관점 아래에서는 병영 수준의 체벌이 일상에서 끊이질 않는다.

이것은 교육철학의 문제이다. 하나의 ‘가치관’이기에 해결이 만만치 않다. 낡은 관념, 낡은 이데올로기이지만, 통제와 복종 그리고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힌다는 약육강식 논리는 어찌된 일인지 우리 사회에서 무척 매력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현실에서 대다수 교장들의 가치관이기도 하고, 또 상당수의 학부모, 적지 않은 학생들도 여기에 동조한다. 오랜 권위주의 사회의 산물이랄까. 학교의 통제적 분위기는 교사 일방의 문제가 아니라 각 교육 주체의 동의에 어느 정도 바탕해 있다. 어떤 체벌 통계조사에서 학생들이 체벌에 찬성한다는 비율이 어느 만큼 계속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의식을 어떻게 전환시킬 수 있을까. 간단히 생각하면 교육청에서 연수하면 되지 하고 대답할지 모른다. 유인물도 몇 장 내려보내고 하는 식으로. 그렇지만 이 문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솔직히 우리 사회는 창의적인 인간을 요구하는가? 혹시 말 잘 듣고 적당히 순종할 줄 아는 인간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사회 전체가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우리네 학교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학교에서 공식 의사소통 체계인 교무회의 문화가 그렇고, 학급 분위기가 그렇다. 이미 온몸으로 그렇게 하고 있기에, 몇 마디 말을 똑바로 한다고 해서 곧바로 바로잡힐 일이 아니다. 꼭 우리 국민들이 재벌을 입으로만 비판하면서, 온몸으로 추종하듯이 말이다. 자기 집안에 재벌에 취직한 사람이 있으면 자랑하듯이.

사회 전체 문제이기에, 이 부분은 모든 사람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교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교실에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학교에서, 교육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교육부에서 말이다. 이번 보충수업·자율학습 폐지 결정은 교육부가 할 수 있는 좋은 실천 모범사례이다. 입바른 소리로만 입시교육을 비판하지 말고, 현실에 작용하는 힘인 행동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인간관리의 교육관, 통제적 교육관은, 체벌을 키워내는 인큐베이터다.

이 교육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 인용한 학생들의 글로 대신한다.



<학생글 인용 : 김○란 학생이 쓴 글, 99년 2월 졸업>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당신은 나의 선생님이 될 수 없어요������(정명훈, 프리미엄북스)와 같이 나의 선생님이 될 수 없는 분이었다. 단체생활, 단체활동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들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도 침해하셨다. 하다못해 교복 속에 블라우스 대신 폴라티를 입는 것조차 허락없인 안 됐다. 같은 반이라면 모두 다 똑같은 걸 입어야 한다는 웃기지도 않은 핑계를 대면서 마치 우리를 야단칠 궁리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바로 선생님의 권위였다. “니들도 아니꼬우면 선생해라”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내가 담임선생님께 질려버린 데는 또한가지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누군가가 선생님에게 혼나고 있으면 자신들은 신나한다. 선생님은 교묘하게도 그점을 이용하시는 것이다. 언젠가 국어시간에 배운 말이 생각났다. ‘폭력보다도 더 강한 것이 동의이다’ 선생님은 재치있는 말로 창피를 주어 다른 아이들의 웃음이라는 동의를 얻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시키면서 마치 한편의 코미디 연극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 싫다. 그리고 선생님이 누군가를 때릴 때 잔인하게 웃어대는 아이들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다. 누군가가 그건 옳지 않다고 아이들에게 깨우쳐주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이들은 그런 말을 들어도 잘 모를 것 같다. 담임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상당수 되기 때문이다.





<학생글 인용 : 강○자 학생이 쓴 글, 99년 2월 졸업>

우리나라는 옛부터 스승의 체벌을 학생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지만 요즘에 체벌은 이런 성격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어느 선생님이 그날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괜한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의 교사들은 체벌에 진정한 의미보다는 학생들이 자신의 틀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체벌을 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 같다. 한때 대중매체에서 체벌에 대한 찬반론이 대두되었는데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교사가 가하는 체벌이 진정으로 학생을 위한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맞을 의향이 있다. ····대다수가 공부를 자신이 알아서 하는 자율적인 학습이 아니라 선생님·부모님이라는 공포의 인물들의 집약적인 요구에 따라서 하는 듯해서 지금 학생의 신분을 지니고 있는 나로서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다. 성적은 떨어질 수도 있고 또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일등이 있으면 꼴찌라는 인물이 있고 꼴찌가 있으면 일등이라는 인물이 있듯이 항상 일등만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른들은 너무 일등만을 원한다. 아직 생각도 머리도 몸집도 어린 정말 아직은 어린애 같은 초·중등학생들에게 너무 일찍 큰짐을 맡겨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이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매고 자신의 키보다 몇 배나 큰 산을 향해 누군가가 가라고 하니까 그냥 가는 것은 아닌지.... 나는 오늘 새삼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주위의 선생님들 중에서 정말 나의 선생님이 아니 우리의 선생님이 될 수 있는 분이 있는지 이것이 의문스럽다. 학교는 정말 우리의 수용소일까?





3-3.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일깨운다는 생각에서

이 관점은 학생들이 잘못한 데 대해 말로 일깨워서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생각이다. 감정적이거나 통제적이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적지 않은 교사들이 어느 정도 인정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두 경우에 견주어보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체벌을 없애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다. 이때 대안에는 실천적 대안과 이론적 설득이 함께 들어있어야 한다. 교사가 전문가라면 때리지 않고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고, 사람의 신체에 아픔을 주는 일은 인권에 어긋난다고 주장할 수 있고, 맞으면서 자란 아이는 폭력에 무감해지고 폭력을 내면화해서 사회적 폭력을 재생산해내는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이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는 논리를 주고받으며 토론할 수 있다. 이들은 학생의 인간 발전을 최고목적으로 하지 않는 왜곡된 가치를 가진 교사들이 아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제 삶으로 교직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칫 통제적 교육관을 갖는 사람이 이 생각을 갖는다면, 더욱 답답한 학교를 만들어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쳐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교육 현실이 이 관점의 극복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이다. 교실에서 학습하는 상황을 따져보자. 교사는 말하고 학생은 하루종일 가만히 앉아서 듣는다. 정해진 진도를 정해진 지식을 교사는 전하고 학생은 전해받는다. 이 수동적인 분위기 자체가 체벌을 일구어낸다. 이러한 단순행동의 반복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이 지친 일상이 체벌을 부르는 상황으로 학생과 교사를 이끈다. 여론조사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체벌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사회적 처지에서는 그런 사회적 의식이 다수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

하루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만 있는 학생이 무슨 예의를 익히고, 무슨 인간에 대한 배려를 배우겠는가. 정해진 커리큘럼을 바쁘게 쫓아가다보면 교사가 자기가 ‘인간’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을 때가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답답한 사회에서 우발적이고 엽기적인 폭력 사태가 일어나듯이, 교사 폭력이나 학생 폭력이 도둑처럼 찾아올 것이다.




4. 체벌을 대체해서 해볼 만한 시도들

잘못한 학생에게 고통을 주어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희망이 없는 관점이기에, 교육적이지 않다. 진정한 ‘꾸중’이란 학생이 자기 행동을 되돌아보고, 그래서 인간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벌’을 말한다.

벌을 안 주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는 이상적 관점은 현실에서 무기력하다.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은 먼저 이상교육을 할 수 없게 하는 콩나물 교실이나 입시 제도나 돈을 최고가치로 여기는 사회와 싸워야 할 것이다. 다양한 욕망과 권력이 판치는 지금 학교 현실에서, 일정한 통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학생에게 억압적이지 않게 하는 평화교육의 이상은 모든 교사 누구나 고민할 영역이기도 하다. 이상은 언제나 현실의 추한 부분을 비추어주기에, 우리가 나아갈 더 나은 세계를 알려주니까. 이런 고민 속에서 현장교사들이 체벌을 대신해서 쓰고 있는 방법을 소개해본다.

이 대안들이 교육적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사가 극기복례하는 일이 필요하다. 벌은 교사가 맺힌 것을 푸는 게 아니라 학생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몸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은 요즘같이 공동체 문화가 해체되고 찰나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참 어렵다. 이 영역은 그러기에 인간의 영역이다. 교사가 불완전한 존재로 자신을 자각하며 늘 반성하며 깨어 있도록 애쓰는 것이 최선이라고 본다. 그리고 평소 학생과 맺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어떤 방식으로 교사와 학생이 관계맺을지에 대해 거듭되는 회의와 고민이 있어야겠다.

 

4-1. 몸을 움직이는 일 :

몸은 신체와 정신을 함께 포괄한 말이라 했다. 몸을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인다.


(1) 10초 동안 일어섰다 앉기 :

수업시간에 큰 소리로 하나둘이 떠드는 건 괜찮다. 주의를 주면 되니까. 그런데 전체가 게릴라식으로 떠들면 교사는 아주 힘들어진다. 수업이 진행되지 않고, 누구를 주의줘야 할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는 학생들을 모두 일으켜 세웠다가 10초쯤 뒤에 앉히는 방법이 쓸 만하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하고 학생들을 일어나게 한 다음, 잔소리를 길게 하면 역효과가 나니까,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딱 한마디만 하고, ‘다시 자리에 앉습니다’ 하고 자리에 앉힌다. 계속 분위기가 잡히지 않으면, 다시 일어나게 했다가 20초쯤 있다가 앉게 한다. 간단하지만 학생에게, 교사가 느끼는 문제의식을 전달하는(의사소통하는) 방법으로 그만이다. 실제 써보면, 꽤 효과가 좋다. 이 벌의 힘은 수업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럽다는 교사의 판단을 학생에게 전달하는 데 있다.


(2) 재미있는 몸짓하기 :

벌을 아무리 부드럽게 준다고 해도, 잘못했다는 전제 아래에서 받는 것이기에 벌은 기본적으로 마음에 상처가 되는 일이다. (물론 속이 후련하다는 학생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기에 수업 때 계속 정신이 없는 학생을 지적해서 일으켜 세운 다음, 거기에 맞는 재미있는 몸짓을 하게 하면, 재미있으면서도 부끄럽기에 잘못을 비억압적으로 지적하는 효과가 있다. 수업 때 서로 때리며 장난을 심하게 논 학생은, 의자를 뒤로 들고 가서 그 의자 위에 올라선 채 자유의 여신상을 흉내내게 하고, 자꾸 떠드는 학생에게는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의자 위에 올라가 서 있게 한다. ‘너는 지구를 지키는 슈퍼맨을 본받아라’ 하며 슈퍼맨 자세를 취하게 해도 좋다. 그러면 벌을 주는 순간 생기는 어색한 분위기를 새로운 생기로 바꾸어낼 수 있다. 몸짓은 오래하면 안 되고 5분 안에 풀게 해준다. 이렇게 세워두는 벌은 오래해서 별로 안 좋고 짧게 인상깊게 해야 좋다. 이 벌의 힘은 잘못을 부끄러움과 우스개로 풀어내는 데 있다.


(3) 손잡고 운동장 한 바퀴 돌기 :

교육에서 통제란 그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되어 있을 때 문제이지, 모든 통제가 악인 것은 아니다. 소규모 학교가 아닌 대규모 학교에서 어느 정도 통제가 없다면, 학교는 유지되지 않을 수도 있다. 반 전체가 책임없는 행동을 했을 때, 그래서 교사가 반 학생 전체에게 ‘그 행동은 문제가 있는 거야’ 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쓰는 방법이다. 두레(모둠,조)별로 손을 잡게 한 다음, 나란히 서서 운동장을 한 바퀴만 돌고 오게 한다. 손을 놓고 자기 혼자 앞질러 가는 두레(모둠)는, 다시 한 바퀴를 더 돌게 한다. 운동장에 신발주머니를 들고 나가설 때는 잠시 심각해지다가, 막상 뛰어보면,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처럼 되어버린다. 그것으로 족하다. 몸을 쓰는 벌은 무릇 시작이 엄숙하고 끝이 즐거워야 한다. 아이들에게 친구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도는 일은 색다른 인상을 준다. 어떤 행동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 자체로 벌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기억에 새겨지는 것, 이 점이 핵심이다.


(4) 업어주기 :

학생끼리 몸을 부대끼게 하는 일이다. 말썽장이들이 계속 속을 썩일 때, 의미있는 숙제를 내주었는데도 거듭해서 해오지 않을 때, 쓰면 좋다. 수업 끝내고 불러다가 일장훈계를 한 다음,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서 둘씩 짝은 지은 다음, 서로 업어주면서 정해진 거리까지 교대로 갖다 오게 하는 벌이다. 너무 힘들지 않게, 그러나 땀은 조금 날 만큼 시키면,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재미있는 벌이다. 치마 입은 여학생에게 이 벌을 시키실 분은 없겠지.


4-2. 학습과 관련해서 :

(1) 시 외우기 :

분위기 있어지는 벌이다. 그전까지 잘못하면 두들겨맞아본 적밖에 없는 학생이, 잘못해서 교무실에 와서 시를 외우는 모습을 보면, 학생 스스로도 자신을 대견하게 여긴다. 나쁜 행동을 좋은 언어를 통해 촉촉하게 적시는 방법이라고나 할까. 시 외우기는 숙제를 안 해온다든지 하는 간단한 상황에서부터 그밖에 여러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부담없는 방법이다. 수업시간에 본 만화책을 압수했을 때, 대여점에서 빌려온 만화책이라며 돈 물어줘야 한다며 다시 돌려달라고 사정하는 학생에게 딱히 줄 벌이 마땅치 않을 때도 시 외우기는 쓸 만하다.

소박한 수준에서 시 외우기 벌은, 학생들이 이해할 만하고, 내용도 좋은 시집 대여섯 권을 준비해놓고, 일이 있을 때마다 학생에게 시집을 한권 집어주고, 마음에 드는 걸 한편 골라서 외워오게 하면 된다. 더 적극적으로 시 외우기를 활용하려면, 상황에 따라 권해줄 시를 파일에 끼어놓고서, 그때그때에 따라 ‘이게 좋겠구나’ 싶은 시를 외워오게 하면 된다. 편집을 해서 조그마한 종이에 복사해놓고, 한 장씩 나누어주어도 좋다. 이때 주의할 점은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시, 감동이 있는 시여야 한다는 것이다. 뜻도 알지 못하는 어려운 시를 권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암기훈련일 뿐, 다른 기대 효과가 없어진다.

✔ 상황

✔ 그에 어울리는 시 ✔

다툰 학생에게

곽재구, 「받들어꽃」, ������받들어꽃������, 미래사

청소를 도망친 학생에게

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자유롭게 1편

떠든 학생에게

������내 무거운 책가방������, 실천문학사. 자유롭게 1편

지각한 학생에게

서정홍, ������58년 개띠������, 보리. 자유롭게 1편

숙제를 안해온 학생에게

양정자, ������아이들의 풀잎노래������, 창작과비평사. 자유롭게 1편

그밖에 학생이 호응할 만한 책들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 미래사.

김상욱,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푸른나무.

������선생님과 함께 읽는 우리시 100������, 실천문학사.


(2) 책읽고 글쓰기하기 :

심각한 문제를 저질렀을 때다. 담배를 피웠을 때나, 계속 같은 잘못을 오랫동안 했을 때, 처벌 대신 쓰는 방법이다.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글을 받거나, 책을 한권 사오게 해서 읽게 한다. 담배 피다가 걸린 학생에게 나는 이렇게 묻는다. “학생과로 가서 벌점 받고 근신을 받을 테냐? 아니면 책을 한권 사와서 독후감을 쓸 테냐?” 이때 역시 학생이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학생이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고통인 그런 책은 적당하지 않다. 어려운 고전보다는 최근에 나와서 학생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책을 권하는 게 좋다. 그리고 꼭 감동이 있는 책이어야 한다. 감동이 없으면 교육도 없다.


✔ 요즘 청소년들이 잘 받아들이는 책 몇 권을 소개함

가정이 문제가 있는 학생에게 : 김한수, ������봄비 내리는 날������, 창작과비평사

세상 편한 것만 아는 학생에게 : 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친구들을 자꾸 괴롭히는 학생에게 :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문학사상

지혜가 필요한 학생에게 : 윤구병, ������꼭 같은 것보다는 다 다른 것이 더 좋아������, 푸른나무

학교에 적응 못하는 학생에게 : 이상석,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 친구

성적인 문제가 있는 학생에게 : 김성애·이지연, ������내가 알고 싶은 것 그러나 하이틴 로맨스에도 포르노에도 나오지 않는 것������, 또하나의문화

이성교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에게 : ������세상의 절반 여성이야기������, 우리교육

책하고 거리가 먼 학생에게는 동화를 권한다 : 위기철, ������생명이 들려준 이야기������, 사계절

때로 만화를 써도 좋다 : 최정현, ������반쪽이의 육아일기������, 여성신문사.


4-3. 교사와 학생이 서로 교감하는 일 :

(1) 신체접촉하기, :

수업에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을 때, 계속 정신없이 떠들거나 너무 건방진 행동을 할 때, 슬쩍 그 학생에게 가서 꼭 안아주며 턱에 난 수염으로 꾹 찔러주는 일이다. 남자 교사가 남학생에게만 쓸 수 있는 벌이다. 학생들은 그럼 난리가 난다. 서로 몸이 맞닿을 때 생기는 연대감을 이용한 것이다. 가만히 손을 잡고 잠시 동안 있을 수도 있다. 점심시간 같을 때, 손을 잡고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야기 나눌 수도 있다. 동성간에 하는 것이 좋고, 이성간에는 삼갈 일이다.


(2) 그때 상황에 대해 글쓰기하기 :

자신이 한 행동을 차분하게 되돌아보게 해서 학생 스스로 자기 행동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처지를 합리화하는 속성이 있어서, 잘못한 그 순간에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때가 많다. 글쓰기가 갖는 힘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인데, 그 특성을 이용한 벌이다. 경찰 조서처럼 ‘네가 잘못했지? 써!’ 하고 소리치고서 쓰게 하면, 교사의 비위에 맞추는 글이 되어 효과가 반감되니까, 조심해야 한다. 사실 자체를 꼼꼼히 쓰라고 주문하면서, 그때 네 마음을 적고,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지를 짐작해서 적어보라고 얘기하면 된다.


(3) 불러다가 1:1 대화하기 :

나-전달하기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큰소리내면 학생도 같이 큰소리낼 수도 있어 난처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또는 학생이 아예 입을 다물어버려 일방적 훈계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나-전달하기’란 ‘그 상황에서 나는 이런 기분이 들더라. 또 이런 생각도 했지’ 하는 식으로 문제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지를 담담하게 1인칭 시점으로 독백하듯 말하는 방법이다. 상대방에게 ‘너 왜 그랬어. 맛 좀 볼래.’ 하고 따지는 말은, 교사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가 하는 ‘결과’를 보여줄 뿐이어서, 그 앞에서 학생이 할 수 있는 말이란 ‘잘못했어요. 죽여주세요.’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나-전달하기로 말을 하면, 학생도 교사가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이렇게 얘기를 교사가 먼저 꺼내 놓아야, 학생도 적어도 교사가 자기 심정을 말한 만큼은 이야기를 해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4) 남아서 선생님과 함께 퇴근하기 :

장난꾸러기들 가운데는 지적을 받고 교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또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이 있다. 성장기라 제 몸의 기운을 주체 못하는 것이다. 몇 번 계속 청소를 하지 않고 도망가는 아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서 앞으로 잘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날 또 청소를 도망가버리는 학생을 보면,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 든다. 그런 아이들은 또 모질게 한번 혼나고 나면 그런 버릇이 고쳐지기도 해서 더욱 체벌해야겠다는 충동이 교사에게 강하게 생겨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체벌을 하지 않고서 할 수 있는 지도방법이, 선생님과 함께 퇴근하기이다. 수업이 끝난 다음 곧바로 신발주머니를 들고 교무실로 오게 해서, 교사 옆자리에 앉혀두고 책을 읽게 하는 것이다. 크게 윽박지름은 이미 다른 선생님에게 여러번 당했을 테고 하니, 많은 말을 하지 말고 그저 옆에 앉혀두기만 하면 충분하다.


(5) 교장실에서 1시간 머물기 :

정학이 없어지면서 근신이라고 해서 교무실 복도에 책상을 갖다두고 하루를 지내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이 아이들은 그러나 사실 방치 상태이다. 학교 구석구석에 있는 휴지나 줍고, 잡스러운 일에나 동원된다. 수업이 아주 싫은 어떤 아이들은 오히려 복도에 책상 갖다 두는 일을 오히려 더 좋아한다. 그렇게 근신하는 학생들에게 하루 1시간씩 의무적으로 교장실 소파에 앉아 있게 하면 어떨까. 소극적으로는 교장실에 그냥 편하게 앉혀만 두어도 좋다. 교장 선생님은 신경쓰지 말고 자기 일을 보면 된다. 적극적으로는 교장-학생 상담록을 만들어서 할 수도 있다. 신세대 아이들이 버릇없다고 하지만 나이 지긋한 교장 선생님 앞에서까지 그럴까. 여러 가지를 몸으로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좋은 체험학습의 장이 바로 교장실이다.


4-4. 그밖에 :

(1) 종이에 줄긋게 하기 :

흥분한 학생에게 쓰는 방법이다. 요즘 보면, 선생님께 주먹을 날리는 일이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되는데, 보편적 현상이다. 이런 모습이 점점 많아지는 까닭은 어른들이 행동을 잘 못해서 청소년들에게서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산업사회 핵가족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또래집단 안에서 갈등 해소 방법을 잘 못 익혔기 때문이기도 하고, 승자보다는 패배자를 더 만들어내어 기죽이는 우리네 학교 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몇 번 위압적인 학생의 몸짓에 당황한 적이 있다. 수업시간에 3-4분 동안 계속 이상한 손동작을 하기에 지긋이 손을 잡으며 그만 하라고 했더니, 내 손목을 탁 잡으면서 ‘힘도 없으신 분이 왜 그러십니까’ 한 적도 있고, 잠자는 학생을 깨웠더니 그 학생이 일어나서 쓰레기통을 뻥 차버린 일도 있었다. 종이 위에서 1센티를 줄긋고 그 다음 1센티를 띄고 다시 1센티를 줄긋고 1센티를 띄고, 가로 세로를 이렇게 하게 한다. 감정절제를 하지 못해서 거친 행동을 한 학생에게 시킬 만한 벌이다.


(2) 운동장 걷게 하기 :

역시 감정절제를 못해서 막 나가는 학생에게 자기 행동을 되새겨보고 자기 자신과 만나라는 뜻에서 시키는 벌이다. 길을 오랫동안 걷고 있으면, 자신과 관련된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온갖 이야기들과 만나게 된다. 군인들이 행군을 싫어하는 이유가, 몸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생각이 여러 가지로 너무 많이 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길을 오랫동안 걷는 일이 전통적으로 종교적 수행에 속해 있는 이유도 이와 같다. 자기를 제어하지 못해서, 상황을 난감하게 만드는 학생이 있다면, 조용히 불러서 이름을 불러준 다음 짧게 대화를 나눈 뒤 길을 걷게 해도 좋다. 반드시 너무 덥거나 춥지 않은지 날씨를 고려하고, 30분에서 1시간 사이를 안 넘기는 게 좋다.


(3) 공익광고 :

담배를 피웠을 때 쓰면 좋다. 보통 학교에서 담배를 피다 걸리면, 몽둥이로 여러 대 맞는 일로 시작해서 크게 혼이 나는데, 그것은 ‘이렇게 크게 혼나니까 하지 말아라’ 하는 겁주기 정책이다. 그러나 이 겁주기 방법은 그 과격함으로 해서, 잘못한 학생을 그 방향으로 낙인찍어버리는 역효과도 커서, 그 대안으로 생각해낸 방법이 공익광고다. 이 방법의 교육적 의미는 보편적 규정을 어긴 데 대해 학생이 스스로 자신의 명예를 고민하게 하는 방법이다. 잘못한 일과 관련된 구호를 만들게 한 다음, 다른 반 교실로 들여보내 웃는 얼굴로 인사하게 하고 구호를 큰 소리로 3-4회 외치게 한다. 이때 구호의 끝을 ‘합시다’ 투가 아니라 ‘해요’ 투로 하면, 구호가 부드러워져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담배는 만수무강에 해로워요. 건강한 청소년이 되어 아이엠에프를 극복해요.” 이 웃음에 규칙을 어기는 어두침침한 마음을 치료하는 효과가 숨어 있다. 자존심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에, 서로 의지할 수 있게 꼭 두 명 이상이 함께 하도록 하고, 여학생에게는 조심해서 써야 한다.


(4)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시간 갖기 :

쉬는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교실에 들어오니 아이들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먼지도 자욱하고 어디선가 과자 냄새도 난다. 이런 어수선한 상태에서 수업을 시작해보았자 좋은 기분일 것 같지 않다. 잠깐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 수업 시작하기 전 이렇게 3분에서 5분 정도 눈을 감고 몸가짐을 바로 하고 있으면, 교사와 학생 모두 몸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어수선하면, 교사도 학생도 짜증내기 쉽고, 이 짜증은 상호 증폭이 되어서, 안 좋은 일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체벌을 미리 예방하는, 관계를 개선하는 방법이다.


(5) 수업시간에 자꾸 화장실을 가겠다는 할 때 :

생명체인 사람이기에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될 때가 있는데, 학생들이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선 담배를 피거나 매점에서 과자를 먹거나 하기 때문이다. 또 여럿이서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한참 있다가 들어올 때도 있다. 보통 교사들은 처음에 수업 때 화장실 가는 걸 허용하다가, 나중에 학생들이 악용하는 것을 보고, 아예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못 가게 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말 몸이 안 좋아서 화장실을 꼭 가야 하는 아이가 있는데, 평소 다른 ‘양치기 소년’들이 한 장난 때문에, 화장실에 가지 못한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는 한 사람씩 화장실을 가게 하면 문제가 쉽게 풀린다. 먼저 화장실에 간 사람이 돌아오면, 그다음에야 두번째 사람이 나갈 수 있게 하면 된다.




5. 체벌에 대한 잘못된 대안들

5-1. 때리는 것보다 더 학생들을 꽉 잡을 수 있어요! : 빽빽이

백지를 주고서 거기에 깨알같은 글씨를 꽉 채워오라는 벌이다. 전국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벌로, 학생의 모든 삶의 영역을 제약하는 최악의 벌이라 할 만하다. 이 벌은 ‘공부를 시킨다’거나 ‘애들을 잡아야 한다’는 선의를 내세우지만, 빽빽이가 공부가 되리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매하다 하겠고, 만약 학생들을 잡아놓겠다는 의도라면 그것은 일상의 식민화라 하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한 벌 같지만, 빽빽이를 해오지 않으면 가혹한 체벌이 기다리고 있기에, 체감 공포는 최고다!!! 일상의 영역을 식민지화하는 벌이어서, 학생들은 머리가 점점 나빠진다. 학습의 관점에서도 폐해가 아주 심한, 그리고 몸으로 느껴지는 고통도 아주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도 최고인 벌로, 이 벌이야말로 ‘가혹행위’로 규정하고 교육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


5-2. 이렇게 감동이 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 반성문 쓰기

옆자리 선생님이 감동을 받은 표정이다. 그러면서 한탄한다. “애들이 쓴 반성문을 보면 어휴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찡~한데 왜 하는 짓은 계속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는 아~하고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선생님 그거 아니에요. 그거 다 사기에요.’ 아이들은 교사의 마음을 이미 알고 거기에 맞춰준다. ‘요즘 아이들을 뭘로 보는 겁니까.’ 반성문을 일상적으로 써오게 하는 교사도 있는데, 그 교사에게 속한 아이들은 반성문 몇 장을 정말 순식간에 다 써낸다. 정해진 각본이 뻔한 글이어서,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좋은 분이십니다. 제가 죽일 놈이지 선생님 같은 분이 신경써주시는데 그런 일을 하다니요. 다음부터 잘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성문 쓰기는 학생을 사기꾼으로 만드는 지도방법이라 하겠다. 반성문이라는 글의 양식 자체가 전망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항복과 굴종의 표시밖에 안된다. 학생들은 그러는 척하는 것이고. 거기에 교사가 자기만족할 뿐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생활일기나 생활이야기 또는 그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는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5-3. 학교판 박정희 향수? : 해병대 체력단련

요즘 와서 왜 이런 방식이 자주 텔레비전에 등장하는지 답답하다. 고생을 안 해 봐서 아이들이 버릇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과거 독재자들을 난데없이 조명을 받더니만, 이제는 그간 계속 청산의 대상이던 군사문화가 학교에서마저 대안 이미지로 자꾸 제시된다. 사회에서 박정희 향수가 부는 것과 비슷해서, 예민하게 주의해야 한다. 물론 집단체력단련도 교사가 함께 학생과 똑같이 뛰면 교육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칫 체벌을 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한 보복으로 가해지는 과도한 육체훈련이라면. 또는 잘해주면 기어오른다며 학생들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하게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무력시위라면.

그리고 짚고 넘어갈 것 한가지가 있는데, 선착순 뛰기다. 왜 힘없는 아이들은 두 배로 벌을 받아야 하는가. 체력이 약한 아이들은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도 강한 아이들보다 힘이 더 드는데, 힘이 없는 아이들이 또 운동장을 돌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선착순 뛰기는 동료를 밀쳐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비교육적 가치를 담은 벌이다.


5-4. 이거 체벌을 대체한다는 제도 맞아요? : 벌점제도

벌점제도는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이 제도를 칭찬하는 학생은 별로 보지 못했다. 교사들 또한 떨떠름한 표정들이다. 체벌을 대체한다는 이 제도에 대한 반응이 왜 이럴까?

첫번째는 벌점을 주면서도 할 체벌은 또 다 한다는 문제제기이다. 때리시던 분들은 벌점을 주면서도 못내 아쉬운지 손을 댈 때가 많은 모양이다. 과거에는 때리고 끝났는데, 이제는 때리고서 벌점까지 준다는 것이다. 벌점제가 체벌을 없애기는커녕 통제를 위한 족쇄로 변하는 순간이다. 과거에는 교문에서 복장이 걸리면 한두 대 맞고 벌 쓰면 끝났지만, 이제는 한두 대 맞고 벌점 받고 엎드려뻗쳐까지 하고 와야 한다는 불만이다.

두번째는 벌점제가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는 불만이다. 생활하는 과정 그 자체가 평가의 요소가 된다는 사실은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들린다. 시험성적이 아니라 생활 태도가 평가 요소라니, 꼭 인성교육에 한걸음 더 다가선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많다. 벌점을 받았다고 그 벌점을 상점으로 대체해야 한다며, 만만한 선생님께 목숨 걸고 쫓아다니는 모습하며, 상점을 많이 받아 나중에 선행상을 받는 학생을 보면 묵묵히 제 일을 소리없이 하는 학생이라기보다 요령있게 어른·교사에게 잘하는 학생일 때가 많고(그래서 두뇌좋은 일진회 짱이 선행상을 탈 뻔한 적도 있다), 좀 불러다 특별실 청소를 시키려 해도 ‘상점 주실 거죠? 안 주면 안 해요’ 하고 싹 돌아서는 아이들을 보게 되고, 이거 영 벌이 벌 같지 않고 상이 상 같지가 않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이 제도가 갖는 문제는 운영하면서 고칠 문제가 아니라, 제도 자체에 내재한 모순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더구나 본래 취지대로 시행해도 문제가 많은데, 본래 취지마저 왜곡해서 이 제도를 시행한다면 어떨까. 벌점제도가 처음 시작될 때 어느 학교 풍경이다. 교사들 전반적으로 반대하자, 어느날 갑자기 교장의 명이라며 실시했다. 학생부 교사들이 다짐하던 목소리가 들린다. “맛을 보여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벌점을 우습게 본대두.” 그 앞에서는 「모래시계」 삼청교육대에서 본 군대 유격훈련 피티체조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끝나고 여학생 몇몇은 담임선생님한테 가서 눈물 흘리고 있고. 이거 벌점제인가? 아닌가?

벌점제는 일상의 짜증화다.

그리고 체벌? 사라지지 않았어요.

6. 글을 마치면서 : 남은 이야기

체벌에 대해 글을 쓰다 보니, 꼭 황색저널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쩌랴. 이 모든 게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인 것을. 교사인 내가 신나는 학교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맥이 풀린다. 추한 현실을 자꾸 드러내야 현실에서 자유가 점점 더 넓어진다고 하니, 그 말을 믿을 뿐이다.


6-1. 현상을 보고 욕하는 것 당연하지만 원인을 살펴달라,

“교사 집단을 범죄자 취급하면서는 교육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 말은 나에게 무척 굴욕적이다. 비굴하게까지 느껴지는 변명이다. 욕먹을 게 있으면, 욕먹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도 있다. 교사집단의 엉망인 행태에 대해 비난하면서, 왜 교사들이 그렇게 나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파고드는 목소리를 보지 못했다.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난다면, 아궁이를 살펴야 하는 법이다. 문제를 일으킨 교사 몇을 쳐버린다고 해서, 낡은 학교사회가 개혁되리라 믿는가.

돌아보면 학교 사회란 곳은 얼마나 비민주적인지! 일방전달식의 교무회의, 3년 안 된 교사가 교무회의에서 발언하면 눈치 주는 분위기, 논의하다가 말이 막히면 ‘학교는 교장의 명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고 말하는 오만함이 있는 곳. ‘진정 중요한 것들은 외면하면서 지나쳐도 별 상관없는 작은 잘못에만 매서운 우리들’(김명인, 「동두천」)이 우리네 교사들의 모습이다. 군것질할 돈을 모아 굶주린 북한 사람들을 돕게 했다고 교무실에서 교감에게 멱살 잡힌 교사가 있는 한, 교사 집단의 낡은 행태는 영원할 것이다. 교사가 교사답게 교단에 설 수 있을 때, 교사의 부정적 모습들도 자체 치유될 수 있다.

건강한 교사가 나올 수 없는 환경에도 관심 가져주기를! 이런 학교상황에서는 멀쩡한 교사도 ������여고괴담������에 출현하기에 적당한 교사가 되기 쉽다.


6-2. 최고의 의술이란 병이 안 생기게 하는 것

규칙과 법은 제 역할이 있다. 규칙과 법을 적용하고, 규칙과 법의 힘에 기대어서 이 문제를 푸는 것은 한 방법이다. 하지만 세상의 여러 일들 가운데는 규칙과 법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일도 많다. 살이 썩어서 고름이 찼을 때 그 고름을 짜버리는 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평소 몸을 건강히 해서 곪는 곳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교사집단의 건강한 부위를 계속 키워주어서 곪은 부위를 치유한다는 생각도 함께 하면 좋겠다. 언제나 최고의 의술은 병을 생기지 않게 하는 예방의학이 아닌가.

사범대학 교사양성과정 문제도 이야기하자.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 대해 고민할 내용을 교사양성과정에서 가르쳐야 한다. 지금 사범대의 열악한 현실에서 안주하는 교육과정에서, 체벌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교사가 어디 길러지겠는가. 왜 사범대의 교육과정은 그토록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와 거리가 먼가. 교사들은 제대로 된 감정 조절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 체벌이 이토록 중요한 사회 쟁점이자 교육 과제라면, 그것을 대학에서 체계있게 가르쳐야 한다. 관점없는 초임교사들의 무분별한 체벌이 문제가 될 때도 있다.

이렇게 체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나도 초임시절 한때 학생을 때리는데 재미를 붙인 적이 있었다. 한번 두번 때리다보니까,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딱 집중도 더 잘하고 해서 멋모르고 학생들의 종아리를 걷어올리게 하고 손을 댄 적이 여러번이다. 너무 엉망이라고 판단되는 학생을 아주 세게 패준 적도 있다. 대학 때 교육에 대한 공부를 소흘히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학문이란 본래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인류가 고민을 축척해온 성과라고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공부는 현실과 지나치게 거리가 먼가 보다. 나는 열심히 여러 외국 상담이론가 이름을 외우고, 이론을 배웠지만, 내 눈앞에서 나를 열받게 하는 ‘학생 한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목소리를 들은 바가 없으니 말이다.


6-3. 폭력에 주눅든 학생은 나-당신-우리 사회 전체다.

폭력에 주눅든 사람은 짜증내는 언어를 사용한다. 합리적으로 의사소통을 해보지 않았기에, 늘 뒤에서 상대를 씹어버리기만 했던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말문을 틔워주면, 건설적인 이야기는 별로 안 나오고, 온통 투덜거림 천지다. 가끔 ‘애들 잘해줘봐야 기어오르기만 해’ 라는 말을 듣는데, 아이들은 실제 그러기도 한다. 민주적 의사소통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대화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불평의 언어를 가지며, 본능적으로 약육강식의 논리를 내면화한다. 끔찍한 일이다.

학교를 바꾸는 일은, 우리 사회를 바꾸는 일의 한 출발점이다. 힘의 위계에 따른 복종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좀더 부드럽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비폭력적으로 가르친 아이들이, 나중에 이 사회를 바꾸어가리라는 꿈을 꾼다. 동시에 이 과정은 폭력에 오염된 내 몸, 내 삶을 바꾸는 일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이 글에서는 학교 안에서 교사와 학생의 만남에 주로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앞으로 체벌에 대한 대안은, 학생 생활지도 차원의 고민이다. 그것은 한 학교 안에 한정되지 않고, 지역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영역이다. 이미 학생은 학교를 벗이나 사회의 여러 곳에 머물고 있기에 그렇다. 이 부분은 아직 남겨진, 앞으로 해야 할 과제다. 학부모들의 몫이다. <雲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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