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밭/산 문

[스크랩] 나는 꿈꾼다(손성란 선생님)

길길어멈 2010. 3. 4. 00:46

나는 꿈꾼다



요즘 아이들 참 바쁘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학원에서도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어른들 덕분에 아이들마저도 무엇인가 결과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바보로 취급받는 세상이니, 아이들이 바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은 교사라는 직업이 그 어떤 직종보다 책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직업이며 또 책과 늘 함께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학창시절엔 이 세상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들이 교사인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참 우습게도 선생 노릇하며 변변한 책 한 권 읽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과 같은 이유에서다. 한 마디로 너무 바쁘다. 얇은 단행본이나 미용실에서 보는 여성잡지를 빼고는 책에 푹 빠져 읽어 본 적이 언제였는지 부끄럽지만 기억조차 아스라하다.

그렇다고 우리의 미래를 꾸려갈 아이들이 책을 통한 감동과 사색 없이 바르게 성장할 수는 없다. 더욱이 아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활짝 열어주어야 할 교사가 당장 수업시간에 필요한 교과서와 교재만을 가지고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충족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상식이다. 아이들이나 어른들 모두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무형의 가치와 이로움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가시적이면서 즉각적인 성과와 현물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아니 오히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보이지 않는 성과로 우리와 함께하는 정신적 산물이라는 속성 때문에 당연히 책과 함께해야 할 사람들마저 책읽기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상태 그대로 그냥 흘러가야 하는가?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하는 명제다. 교육현장에 있다 보니 일상적으로 나오는 언론의 작은 보도에도 아이들과 관련된 단어만 나오면 온 신경이 곤두선다. 이제 겨우 십대를 넘긴 어린 청소년들의 폭력과 범죄에 관한 뉴스를 접하면 정말 쭈뼛할 때가 있다. 그 어린 생명들에게 어떤 양분이 부족하여 저렇게 기형으로 자랐을까? 작은 벌레 한 마리에도 발동되었던 연민과 동정심, 그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경이로움, 움직이지 않는 어떤 사물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상상력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마음이 급하다. 나라에서는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학교의 아침활동 시간에 영어몰입교육을 하라고 학급담임을 모두 불러서 연수를 시키고 영어가 아닌 타 교과도 영어로 가르치라는 요구까지 뒤따르고 있다. 학교에서는 올해 에너지시범연구학교로 지정됐으니 일주일에 한번 아침활동 시간과 재량시간을 이용해 에너지에 관한 학습과 활동을 하라고 야단이다.

집에서는 학교에서 영어를 못하여 자신감을 잃을까 봐, 영어를 못하여 나라의 인재가 되지 못할까 봐 많은 시간과 비용을 영어에 투자해야 하는 부담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아이들은 수학에 논술에 피아노에, 거기다 미술이며 태권도와 영어로 자정이 다되도록 학원을 뺑뺑이 돌고, 이것이 당연한 일과가 되어버려 이만큼 하지 않는 아이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아이가 되어 질책을 받는 형편이다.
그래도 나는 행운아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인근의 과열된 분위기에서 조금 벗어난 인천 연수구에 있는데 아이들의 교육 외에는 신경 쓸 것이 없어 차분히 교사의 의도대로 교육활동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관심 있는 그림책을 함께 읽을 수 있는 2학년 담임이다. 신난다.
우리 학교 역시 요일별로 아침활동이 정해져 있다. 영어, 독서토론, 에너지교육, 안전교육, 학급 특색활동, 악기연주 등등. 하지만 나는 올해 이 모든 것을 과감히 무시하고 일주일 내내 줄기차게 책읽기만 하기로 했다. 어린 녀석들한테 “독후감 써라”, “독서록 내라”, “독후화 그려라”, “독서퀴즈대회를 하자” 등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모두 마음에 안 들던 차에 마음에 쏙 드는 문구를 발견했다.

‘모두 읽어요, 날마다 읽어요, 좋아하는 책을 읽어요, 그냥 읽기만 해요’

어쩜 그렇게 내 마음을 똑같이 표현해 놓았는지 반가운 마음에 교실 뒷면에 이 문구를 코팅하여 붙여놓고 3월 4일부터 무작정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80여 권을 읽은 아이가 두 명이나 있고 50권을 넘긴 친구는 10명 가까이 됐다.
나 역시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아 『멋진 뼈다귀』(비룡소), 『아벨의 섬』(다산기획), 『돼지책』(웅진주니어), 『우리 엄마』(웅진주니어), 『아프리카에 간 드소토 선생님』(비룡소) 등을 읽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제자리에 앉아 책을 읽게 하려면 나 역시 5~6분 정도는 책 읽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어부지리로 얻은 소득이다. 하루하루가 넘어갈 때마다 나의 밑천이 드러날 만큼 아이들의 다양한 독서 기호에 당황할 때도 있지만 이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또 14칸짜리 공책에 1주일에 6번 일기쓰기라는 파격적인(?) 숙제에도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잘 따라와 준다. 일기 한바닥 채우는 것도 힘겨워하던 아이들이 할 말이 생기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일기쯤이야 우습게 쓸 수 있는 과제로 여기는 것도 하나의 변화라면 변화다.

나는 꿈꾼다. 우리 아홉 살배기 어린 제자들이 올 한해 아침독서를 통하여 평생 먹을 식량을 그들의 마음 밭에 저축해 놓고 평생 야금야금 꺼내 쓸 수 있기를 말이다. 우리가 읽은 책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미술, 영어, 체육이라는 교과의 다리가 되어 사통팔달 못가는 곳이 없는 만능 길잡이가 되었음을 곧 알게 되기를. 하루에 단 10분의 투자였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이율이 높은 선행학습이요, 인생연습이었음을 알게 되기를. 평생 함께하는 좋은 친구로 머리맡에, 가슴팍에 늘 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었음을 깨달으며 행복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사랑스런 미래를….


손성란(인천 서면초등학교 교사) / 2008년 04월23일 09:40

출처 : 행복한 동행(심홍섭 시인.아동문학가)
글쓴이 : 목헌 심홍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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