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의 힘>
나는 지금의 내가 가장 아름답다.
부모님께 웃음이 헤퍼서 꾸중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사람이 가벼워 보인다고, 남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아무 때가 웃으면 못쓴다고….
하지만 교사가 되고 나서 5년도 못되어 내 얼굴엔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 하얀 도화지 위에 내가 키우고 싶은 인간상을 마음껏 그려볼 수 있다던 대학시절의 꿈은 거의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발령이 나고 며칠 되지 않아 깨닫게 되었고 결혼과 육아와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에 겨웠다. 게다가 첫아이를 출산 하다가 의료사고가 나는 바람에 열 세 번의 수술을 반복해야 했고 원래 지병을 숨기고 결혼한 것도 아닌데 시댁엔 나는 물론 친정 부모님까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마음고생까지 심했던 터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웃을 일이라곤 없을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거의 만 6년간을 병가에 휴직을 반복하면서 일 년에 고작 40여일 정도만을 출근할 만큼 긴 투병기간을 거치면서 아이들에게도 동료교사들에게도 관리자인 교장 교감 선생님께도 늘 미안한 마음에 눈 한 번 당당하게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한쪽 옆으로 비껴 있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빛의 반대편에 생기는 그림자, 아무리 밝고 환한 곳에서도 그림자는 언제나 주변보다 어두운 색으로 구분이 되는 것처럼 나 역시 밝음의 세계엔 절대로 발을 딛을 수 없는 삶의 구경꾼으로 점점 굳어져갔다.
그러다 보니 아무 일도 아닌 일도 조금만 부정적인 쪽으로 치우치면 이 세상에선 그 보다 큰 일이 없을 만큼의 커다란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자신감이 없어졌고 이상하게 모든 나쁜 일들이 오직 나에게만 일렬횡대로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 같은 피해의식에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바늘 끝 같이 날카로운 내 곁에 남아, 함께 피 흘려 줄 가족이나 오랜 친구들마저 진저리를 내고 하나 둘 멀어져 갔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엔 그들이 참 야속하고 원망스러워 마음으로 미움이 차올랐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와도 내 쪽에서 먼저 내치는 적반하장의 방어막을 치면서 최소한의 상처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보니 나의 표정은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은, 세상의 온갖 고통과 분노는 혼자 다 안고 있는 것 같은 비장하다 못해 무서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화장을 화사하게 하고 밝은 색의 옷을 입어도 내가 만들어내는 공기는 언제나 차갑고 무거운 겨울 같았다고 해도 결코 과장되지 않은 시간들. 그렇게 십오 년을 넘기다 보니 어느 새 나는 마흔 고개를 넘고 있었고 게으름 떨지 않고 부지런히 병원 치료를 하였지만 처음 의료사고로 인해 수술했던 것과는 무관한 몸의 여러 곳들이 번갈아 가며 고장이 나면서 끊임없이 괴롭혔고 주변을 어둡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가짜 웃음과 명랑함을 만들어 가며 학교생활을 했지만 진정한 교사로서의 보람이나 즐거움, 마음 가득 차오르는 동료애나 가족사랑 등의 진정한 삶의 감정들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저 숨 쉬고 있으니 살아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던 2006년 1월16일, 목욕탕에서 넘어져 발가락이 부러지는 바람에 6주 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고 깁스를 채 풀지 못한 상태로 2월을 맞아 새 학년 준비를 하다가 여러 가지 복잡한 학교 사정으로 학년부장 한 번 해보지 않던 내가 졸지에 연구부장을 하게 되는 억지스런 일이 생겼다. 절대로 서로 미루는 분위기가 아닌 적극적인 선생님들이 모인 학교였는데 그 해는 이상하게도 선생님들이 부장 보직 받기를 꺼려하는 바람에 나에게까지 권유가 왔고 수십 번 거절했지만, 교육경력이나 당시 학교에서의 근무 햇수 등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분위기에 의해 결국 연구부장을 수락하게 되었고 휠체어에서 목발, 목발에서 지팡이를 짚어가며 역할을 해 나가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사람에겐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흐름의 지배를 받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의 혁신 바람이 교육계에서도 불어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교육혁신이 무엇인지를 가장 거부감 없이 전달하는 역할인 혁신 강사로 현직교사가 가장 적합하다는 인천시교육청관계자분들의 판단 하에, 각 급 학교에 공모를 하게 되었는데 희망자가 없다고 반복적으로 공문이 쏟아지면서 나를 압박했다. 사실 내 업무가 공문내용을 선생님들께 전달하고 희망자가 없으면 없다고 보고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왜 그렇게 희망자가 없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무도 없으면 나라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겁도 없이 덜컥 희망 공모서를 제출하였고, 공모자들과 함께 일주일의 연수 후, 프리젠테이션 작성과 4번의 강의평가를 통과하여 인천에서 처음으로 19명의 혁신 강사를 배출하는 중에 한 명이 되었다. 나를 제외한 18명은 중고등학교의 교장, 교감선생님이거나 이미 각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검증된 실력을 가진 유능한 분들이어서 내심 위축이 되었고 학교당 배당된 공모인원수를 채운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응모한 것이라 사실 별 기대도 안했는데 나의 어떤 면이 심사위원들에게 전달되었는지 쟁쟁한 강사진에 기적적으로 끼게 되었다. 인천시교육청 관할 내에 있는 초중고 학교를 모두 찾아다니며 강의를 해야 하는 까닭에 인천시교육청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학교혁신의 핵심내용과 강의법 분야, 매너와 화법, 친절의 필요성 등을 내용으로 각계의 명사들을 모셔다가 한 달간의 집중 훈련과 강사 활동 기간 내내 수시 재교육과 정보와 자료교환 등을 하며 활동 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고 첫 교육을 인천 학생문화회관에서 수업을 전폐하고 훈련을 받았는데 그 첫 시작이 친절 교육이었고 친절교육의 첫 관문이 바로 미소와 웃음교육이었다.
강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지 백화점 주차 직원도 아닌데 미소연습이라니…, 소리 내어 박장대소하며 탈렌트 전원주씨 처럼 웃으라는 주문을 받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광대뼈와 입 꼬리를 올리고 눈썹 사이의 미간은 활짝 펴고 치아는 8개 이상 내보이며 따뜻한 눈빛을 담아 웃는 연습을 하루에 한 시간 정도씩 일주일 내내 시키는데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즐겁고 신나는 일이 있어도 제대로 웃음이 나오지 않는 나에게, 나를 시키면 어쩌나 하는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상황에, 낯선 선후배 선생님들을 앞에 놓고 깔깔깔 배를 쥐고 손뼉을 쳐가며 웃어 죽겠다는 듯이 웃으라니…….
강의용 프리젠테이션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거나 강의를 못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웃지 못해서 탈락을 걱정하는 정말 웃기는 일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이런 고민은 아랑곳없이 웃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웃음 강사는 우리 훈련생들을 늘 일으켜 세워 놓고 연습을 시켰고 난 인형처럼 따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첫 연습시간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웃으려 입 꼬리를 올리니 내 광대뼈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웃으라는 명령이 끝난 후에도 멈추질 않고 계속 실룩거리는 것이었다. 너무 당황해서 양손으로 두 볼의 광대뼈를 감싸 쥐고 안간힘을 쓰면서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고 당황한 강사와 옆자리의 선생님들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웃으며 말을 하려는 내 입술까지 일그러지며 경련이 일어나는 데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랬다.
무표정으로 있는 데는 단 몇 개의 근육만이 사용되기 때문에 별 노력 없이도 편안하게 무표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미소나 웃음을 만들려면 광대뼈와 코 주변의 근육은 물론, 입, 눈썹, 이마, 턱 근육 등 42개의 얼굴 근육 중 열 서너 개의 근육 들을 동시에 움직여야 해서 미소 짓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는 강사의 설명처럼 얼굴에 있는 근육들 중 미소라는 표정을 만들어내는데 쓰이는 근육들을 장기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한 것에 대한 벌이었다. 그 날 나는 집에 가서 거울을 보고 자연스럽게 웃는 표정이 나올 때까지 연습을 해오라는 숙제를 받았고 그동안 화장을 하느라 들여다보았던 시간을 모두 합쳐도 모자랄 만큼의 많은 시간을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 다음날 미소 연습 시간엔 어제 보다 조금 덜 어색하게 웃을 수 있었고 광대뼈의 경련을 막기 위해 두 손으로 광대뼈를 누르고 있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훈련 마지막 날에는 전원주씨 만큼 남의 눈치 안보고 시원스럽게 웃는 정도는 아니지만, 소리 내어 5분 정도는 웃을 수 있게 되었고 훈련을 마치고 각 급 학교로 강의를 다니면서,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들에게 긍정적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마음 열기 시간을 위하여 몇 가지의 유머를 나누면서 나 역시 차차 웃음이 늘어나고 능숙하게 되었다. 그렇게 거의 3년간을 인천시내의 학교 40여 곳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다 보니, 나를 전혀 모르고 오로지 강의를 하러 온 어느 초등학교의 여선생 정도로만 아는 선생님들의 강의평에는 ‘ 활짝 웃는 강사의 모습이 참 좋았다. 딱딱한 내용을 부드러운 미소와 활기 있는 웃음을 섞어 전달해주니 좋았다. 강사의 밝은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전달되어 새로운 활기를 얻게 되었다.’ 등의 긍정적인 내용들이 나왔고 이러한 평가들이 모여 교육부에서 인천의 대표 혁신강사로 인정하여 국정브리핑에 교육뉴스에 보도되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현직교사가 혁신강사를 한다는 것이 화제가 되어 서울과 부산의 혁신강사 선생님들에게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 나를 잘 아는 가족들이나 오랜 친구들은 이제야 어릴 때의 네 본모습을 찾았다고 등을 두드려 주셨다. 아직도 친정어머니께서는 집안 행사 때 식구들 앞에서 너스레를 떠는 나를 보면 “ 이게 내 딸 맞아?” 하면서 놀리시곤 해서 그간 걱정 끼쳐 드린 것에 대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게 한다.
요즘 뇌과학이 발달하여 우리의 뇌 속에 1cm ³ 정도의 웃음보가 실제로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흔히 웃음보가 터졌다는 말을 쓰는데 실제로 웃으면 이 웃음보가 터지면서 엔돌핀과 같은 홀몬이 몸에 퍼져 체내에 필요한 에너지를 활성화 시킨다는 것이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바보뇌가 있어 기쁘거나 즐겁지 않아도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 웃는 웃음에도 뇌가 속는다고 한다. 기뻐서 웃는 건지 슬픈 데도 가짜로 웃는 건지 구별을 못하는 바보뇌 덕분에 슬플 때 웃어도 기뻐도 웃을 때와 똑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니 나에겐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보뇌 덕분인지 아니면 긴 시간 동안 바보처럼 살다보니 나의 뇌 전체가 바보처럼 변해서 어떤 일이 생겨도 웃을 줄 밖에 모르는 진짜 바보가 된 것인지 그런 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억지로 훈련 받았던 웃음치료로 인해서 지금의 내 생활이 훨씬 밝아지고 즐거워졌다는 것이다. 의료사고로 인해 지겹게도 파생된 갖가지 질병들은 아직도 내게서 떠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질병들은 이미 나의 오랜 친구가 되어 버렸다.
아직도 고단한 선생 노릇으로, 또 남편이 피땀 흘려 벌어온 돈의 일정량만큼을 이십 년 넘게 적금 붓듯이 병원에 지불하고 있지만 엘리트 의사를 친구로 갖기 위한 품위 유지비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나만큼 다양한 진료과목의 의사를 알고 있는 사람 있느냐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 역시 말도 안 되는 일로 날마다 사고를 일으키고, 상상을 초월한 문제를 만들어, 내가 도저히 풀어낼 수 없게 하지만 나는 늘 같은 답을 갖고 대응한다. 밝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고 천천히 들어준 다음 “ 응, 그랬구나! 정말 그랬겠다! ” 를 연발하는 것이다.
다행히 이 간단한 처방은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잘 듣는 만병통치약이다. 아이들이 나에게 갖가지 방법으로 소리 지르는 것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선생님, 저 여기 있어요. 저 여기 이렇게 살아 있어요. 저 좀 봐 주세요. 저에게도 관심을 주세요. 저를 조금만 더 사랑해 주세요.’라는 간절한 외침이지 ‘제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선생님까지 제 문제를 해결 못해주시면 저는 어떻게 해요. 빨리 판단을 해 주시고 빨리 방법을 알려 주세요. 꼭 답을 알려 주세요.’ 하는 요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를 끝까지 이해해주고 사랑해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하여,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먼저 강한 척, 냉정한 척, 괜찮은 척 했던 나를 너무나 잘 알기에, 강한 척 하면서도 누군가는 나의 약하고 빈 곳을 채워주는 이가 나타나길 바라다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고 신과 세상을 저주하던 과거의 어두운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아픔을 알아주고 그 표면이라도 살며시 쓰다듬어 주는 것이, 말없는 미소와 한 번의 토닥임이 내 어리고 사랑스런 제자들의 마음을 봇물처럼 터져 막힘없이 흐르게 한다는 것을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소처럼 경제적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비싼 보약처럼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많이 쓴다고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 참으로 신통한 묘약이 아닌가 말이다. 스승이 짓는 미소는 제자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안정감을 주어 학업과 생활에 있어 자신감을 얻게 될 것이고 의사가 환자에게 보내는 미소는 반드시 나을 수 있으리라는 위로와 희망을,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가족과 지인들이 보내는 미소는 다시 재기할 수 있다는 용기와 격려가 되어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은밀한 일체감으로 더욱 돈독한 사랑을 일궈낼 수 있는 양분이 될 것이고 아이들에게는 서로가 정말 잘 통하는 친구임을 확인하는 신비로운 명약이 바로 미소이다.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 청소년들의 자신만만한 패기의 미소, 장년의 여유 있는 미소, 노년의 깊은 통찰에서 오는 관조의 미소 등 어느 한 부류의 미소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얼마나 편리한 인간들만의 신호요, 삶의 도구요, 무기요, 비상약인지 모른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과거의 사진 속에 내 얼굴과 요즘 찍은 사진 속의 내 얼굴을 보면서 혼자 빙그레 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었을 때가 좋다고, 그때가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정말 아름답다. 분명히 사진 속의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요즘의 나는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내가 보아도 불혹을 훌쩍 넘어 오십 줄을 넘어선 요즘의 내가 가장 아름답다. 너무 예뻐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이렇게 써 놓고 깔깔 소리 내서 웃는다. 지금 집에는 아무도 없다. 하하하~~~!
2012년 11월 18일 일요일 오후 미소의 힘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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