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밭(펌)/시의늪

[스크랩] 동시 창작법.1/신현득

길길어멈 2010. 5. 24. 18:13

동시 창작법 ①

동시(童詩) 산책(散策)

신 현 득

  동시가 어떻다는 말을 하기 전에 나는 나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나는 사범학교 출신이지만 그 때 어느 곳에서나 다 그랬듯이 아동문학이란 말은 조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졸업했다. 간혹 동화란 말은 들었지만 동시란 말은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학장 시절 나도 남만 못지 않은 문학 지망생이었다. 시(
)도 쓰고 소설도 습작을 했다. 이 중 소설은 그 뒤 지방의 작은 규모의 현상 모집에서 뽑히기까지 했으니 약간은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이런 것을 씁네 하고 제법 우쭐거리기도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곧 교사로 부임을 하게 됐는데 마침 도내(
道內)의 무슨 글짓기 행사가 있어 글짓기 지도를 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종목은 동요·동시·산문이었다. 나는 이 때 처음 동시라는 말을 들었다. 동요는 알고 있었지만, 동시란 말을 처음 들은 나는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봤다.
  「동요가 4·4조 7·5조 등의 정형시이니 동시는 아마 어린이들이 읽을 자유시를 말할 것이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내 생각대로 아이들을 지도해 간 것이 도내 행사에서 3등이란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뒤 그 때 씌어진 아동작품이 모두 지상에 발표되었는데 아이들이 쓴 글은 동요는 없고 모두 동시뿐이었다. 그러자 동시 동요의 구별없이 통틀어 상을 주고 만 것이다.
  그 때부터 아동들의 운문은 동시가 되었고 동요는 이들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단계가 되었다. 이것이 1955∼6년 때의 일이다.
  동요가 아이들의 글짓기에서 사라지게 되기까지는 이상의 과정들을 겪었다. 아마 아동들에게는 자유스런 표현이 가능한 동시보다는 동요가 더 구속적이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을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아직도 신춘문예는 동요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요를 응모하는 사람이 없어서 뽑히는 것은 모두 동시뿐이었다. 동요 모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동시를 당선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는 신춘문예에서도 동시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이것이 60년대의 초기다. 이런 모든 것이 동요와 동시의 미분화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이상의 이야기에서처럼 동시는 동요에 맞서는 아동문학의 장르로 동요가 정형시인데 반해 동시는 자유시의 한 형태이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 나라에서 동시만을 전공하는 사람이 백 명이 넘게 되었지만 그 당시만해도 동시는 개척 단계여서 지금 손꼽을 수 있는 아동문학의 대가급 외엔 없었다.
  물론 아동문학과 글짓기 지도는 별개의 것이며, 전자가 창작 행위인데 비해 후자는 하나의 교육 활동이지만, 어쨌든 나는 나의 아동문학에 접한 코오스가 아동작문이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나는 아동들을 지도하면서 나도 아이들처럼 이런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 지도하는 일은 되는데 내가 글을 쓰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던 것을 지금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습작기에서 애를 태우고 있는 아동문학 지망생들을 선험자(
先驗者)로서 동정을 하면서 격려하고 싶다.
  나는 하루종일 작품을 생각하다가 지쳐서 저녁이면 술을 들이키곤 했다. 괴로운 작업이기도 했다.

    빠꼼
    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

  스무 글자가 되지 않는 이 작품은 이런 피나는 작업 긑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69년도 조선일보에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 그와 같은 힘을 들였던가 싶은 마음뿐이다. 이 작품의 짜임새나 깊이가 뭐 대단하지 못한데도 실망이 되지만 지금 같으면 단 몇 시간만에 써버릴 것을 몇 달을 두고 머리를 짜내던 일이 우습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 때 나에게는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가 창호지로 바른 문을 뚫는 것이다. 어느 아이나 그런 버릇이 있다. 곧잘 손가락을 내밀어 구멍을 뚫는다.
  아이가 있는 집이면 으레 문구멍이 있다. 문구멍이 없는 집처럼 서글픈 집은 없다. 자식이 흔하지 않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문구멍을 뚫을 때마다 아이에게 야단을 쳤다. 셋방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문구멍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문구멍의 높이와 아이의 키와의 관계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상당히 긴 시를 썼다고 기억이 된다. 그러다가 그것을 줄이고 줄인 끝에 남은 것이 이 열여덟 개의 글자였다.
  나는 이 열여덟 자의 동시를 완성하고
  「길이가 너무 짧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내는 작품 가운데 별반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끼워 넣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것이 가작에 뽑힌 것이다. 이리하여 내 이름 석 자가 신문에 발표되었다.
  작품을 써 놓고
  「왜 이렇게도 뭇난이 작품을 썼을까?」
  「참 할 수 없어.」
하고 부족을 느끼는 이들은 이제 안심해도 될 것이다.
  나는 1961년 첫 동시집 <아기눈>을 냈다. 7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4·6판의 작은 책이다. 내가 고백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집의 체재가 못되고 책이 얇다는 말이 아니다. 못난이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뽕잎이 핍니다.
    뽕잎이 피면서
    생각합니다.
    <올에 누에는 입맛이 어떨까?>

    아까시아 잎이 핍니다.
    아까시아 잎이 피면서
    생각합니다.
    <올에 토끼는 입맛이 어떨까?>

  <봄>이라는 작품이다. 어떤 이들이 이 작품을 읽고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사 이 작품이 객관성이 없는 표현에서 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고민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어쩔 수도 없었다. 내딴은 뽕잎이 피면서 누에의 입맛을 생각하고 아까시아가 피면서 아까시아를 가장 즐기는 토끼의 입맛을 생각하는 내용을 그려낸다고 쓴 작품이다. 그런데 그 표현 수법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그밖에도 실패작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읽어봐도 괜찮다 느껴지는 것도 더러 있다.

    까만 아기 눈 속
    샘 그림자.
    조그만 샘 속에
    엄마 그림자.

    그림자 덮고
    잠이 들면
    그림자 살아서
    꿈이 되지요.

    꿈 속에서
    엄마와 뛰어다니면
    찰방찰방
    잔물결이
    일어나지요.

  이 작품은 제법 시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역시 표현들이 분명하지 못하다. 그것은 끝연에 가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이 변변치 못한 작품을 쓰기 위해 땀을 흘렸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기의 눈 속에 내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 그림자를 엄마 그림자로 바꾸어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기눈의 그림자가 어쩌면 옹달샘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는 데서 이런 시를 잡은 것이다.
  어쨌든 힘드는 작업이었다.
  「작품이 잘 씌어지지 않는다. 왜 이렇게도 잘 되지 않는가」 하고 자신을 투덜대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안심해도 될 것이다.

    아가씨가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뒷밭에 목화씨가 베짜는 장단에 싹이 틉니다.
    <딸깍> 한 눈.
    <딸깍> 한 눈.
    <딸깍> 또 한 눈…….
    뒷밭에는 하룻밤 사이에 목화꽃이 소복이 나왔습니다.

    목화싹은 베짜는 장단에 쑤욱쑤욱 키가 컸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잎이 돋고 가지가 나고, 베짜는 장단에 꽃망아리를 맺고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딸깍> 한 송이.
    <딸깍> 한 송이.
    <딸깍> 또 한 송이…….
    목화밭은 하룻밤 사이에 아름다운 꽃밭이 되었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뚝뚝 꽃이 지고 베짜는 장단에 복숭아 같은 다래가 열고 다래가 벌어 목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딸깍> 한 송이.
    <딸깍> 한 송이.
    <딸깍> 또 한 송이…….
    목화밭은 하룻밤 사이에 하얀 솜밭이 되었습니다.

  <목화밭>의 전문이다.
  산문시 목화밭을 쓰기 위해서도 힘드는 작업이 필요했다. 첫째는 베틀 소리에 맞추어 목화싹이 트고 목화꽃이 피고 목화송이가 피도록 하는 일이었고, 그보다도 힘이 든 것은 목화밭을 베틀 가까이로 끌어들이는 작업이었다. 두 번째의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 이 산문시는 절반의 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사실 목화밭을 들판 가운데 두고서는 이 시의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목화밭을 집뒤로 끌어온 것이다. 이것이 아직 그 당시의 내 사고력으로서는 큰 작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목화밭을 집뒤에 두고 나니 베짜는 소리에 목화가 크도록 하는 일은 쉽게 진행되었고 베틀 소리에 싹이 트는 일, 꽃 피는 일 등을 적당한 대구(
對句)로 만들어 행()을 잡음으로써 시각적(視覺的) 효과도 노릴 수가 있었다.

(1978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9호)

 


출처 :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글쓴이 : 물방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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