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스승의 날을 보내며
-2012.5.15. 스승의 날 아침에-
다원 손성란
선생님 죽이기 프로젝트가 최소한 90%는 성공적으로 달성된 것 같다.
선생님을 죽이고 나면 무엇이 남기에 모두들 그리 혈안이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선생님은 그 누구에게도 경쟁자가 아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의 영구전문교육자라고 한다면 선생님은 한시적인 위탁전문교육자이다. 자기 자녀만을 본다면 부모보다 더 정확한 진단과 치료법을 알고 있는 최고의 교사는 없다. 여러 가지 여건 상 부모가 미처 채우지 못한 부분을 맡아 균형 있는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정해진 기간 동안 위탁교육을 맡은 대리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선생님이므로 적이나 경쟁자가 아니고 상호 협력해야 할 협력자이자 동반자이다.
선생님들이 먹는 철 밥통 속에 임금님 수랏상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의 밥이 담겨있어 화가 나는 것일까? 너나 할 것 없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전쟁 직후처럼 가난하지 않아서, 선생님은 반드시 청빈해야 한다는 오래된 편견 때문일까? 아니면 화수분처럼 철 밥통은 숟가락만 들면 저절로 입맛에 맞는 밥과 반찬이 끊임없이 솟아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궁금하다. 선생님 죽이기가 끝나면 무엇이 이루어질까. 무엇이 좋아지는 걸까, 무엇이 남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선생님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나의 아들, 딸이고 조카이고 이모나 고모, 아버지, 삼촌, 옆집에 사는 이웃이기도 하다. 가르치는 이에게는 적당한 위엄과 넘볼 수 없는 어떤 힘이 필요하다. 친구같이, 부모같이 다정하고 자애롭기만 해서는 힘들다. 한두 명의 자녀를 키워본 부모라면 모두 다 인정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사랑과 용서, 칭찬과 격려, 최고라는 자신감 유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을 할 수 있도록 언제나 보장된 아이가 자신의 자녀이기를 바란다.
선생님도 학교를 나오면 또 한 사람의 학부모이다. 같은 나라, 같은 체재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키우고 있는 또 한 명의 학부모라는 것은 선생님도 자기 아이의 선생님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마치 손바닥의 양면처럼 선생님은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학부모이기도 한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서로에 대해 잘 모를 때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자신의 잣대에 맞지 않으면 화가 나기는 한다. 그렇지만 선생님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언제부터 일까? 왜 일까? 왜 이렇게 같은 편으로 어깨를 걸고 나가야 할 사람들조차 선생님들에게 등을 돌리고 스스로 적이 되고 경쟁자가 되어 의심하며 마음 놓고 드러내며 화를 내고 심지어 반드시 이겨야만 만족하게 되었을까?
자신들 보다 안전해 보여서 일까? 자신들 보다 불로소득이 많다고 느껴서 일까? 작은 틈만 있으면 선생님들에게 화를 낸다. 선생님은 이미 단단하게 뭉쳐진 화를 소모할 곳이 없던 사람들이 때마침 발견한 만만한 그 어떤 대상이 되어버렸다. 모든 에너지가 집중된 화를 소모하는 대상이 선생님이 되어버린 듯하다.
스승의 날은 좋을 것도, 싫을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 날이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저 부끄럽고 서글픈 날이다. 이름만 남은 이 날이 차라리 없다면 이런 기분만은 덜 느낄 수 있지 싶다. 선생님들끼리 모여 앉아서 서로 위로하고 마음을 다독이는 그런 날을 해마다 맞이하고 싶지 않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기분으로 스승의 날은 무엇을 선물하는 날이 아니라고 강조할 필요도 없는 말들을 반복하는 낯부끄러운 코미디도 더 이상은 사양하고 싶다.
한 번쯤 근사하게 폼 잡고 촌지를 거절하며 진짜 선생다운 면모를 보이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어진 지 벌써 십 수 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요 며칠 학교 홈페이지를 열면 제일 먼저 툭 튀어나오는 팝 문구는
"촌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맙시다!"
"……!"
웃어넘기는 것도 우습다.
촌지, 그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정성과 뜻이 담긴 마음의 겸손한 표현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는 촌지가 거대공룡의 몸통처럼 부풀어 입에 올리기만 해도 부정부패한 청렴치 못한 파렴치한이 되어버리는 무시무시하고 더러운 단어가 되어버렸다. 이런 오늘날의 스승과 제자, 학부모와의 관계를 먼저 가르침의 자리에 계셨던 옛 선현들은 알고나 계실까?
그래도 새벽부터 몇몇 친구들이 선생님만이 우리나라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고, 우리의 희망이라고 카네이션 그림과 함께 보내온 짧은 격려의 문자에 피식 웃으며 몸과 마음을 다잡는다. 누가 뭐라 해도 이처럼 사랑스런 물건을 만드는 직업이 또 있을까? 재료와 관심과 열정과 끈기가 지나치게 많이 필요한 물건이라 좀 고단하긴 해도 매순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달아주는 요 꼬물거리는 작은 생명체들 기르는 맛에 또 하나의 긴 주름을 만들어가며 오늘도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댄다. 불 때다 만 부지깽이 들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천방지축 개구쟁이 손자를 따라 다니는 시골할머니처럼……,
더 많이 사랑하는 외사랑의 허전함을 잊을 만큼 뻘뻘 땀을 흘리며 허정거리는 다리로 바람 같은 아이들을 뒤쫓는다.
2012년 5월15일 스승의 날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