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동화 작품>
효녀 무궁이
손성란
어느 마을에 아주 사이가 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남편은 산에서 약초를 캐거나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팔고 아내는 집 앞에 있는 조그만 텃밭에서 상추, 가지, 들깨, 고추 등을 심어 가꾸며 큰 돈 들이지 않고도 맛있는 밥상을 차려내어 남편이 배불리 먹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에게 딱 한 가지 걱정거리이자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혼한 지 십 여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아기가 생기기 않는 것이었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상할까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남편도 아내도 아기가 태어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남편은 산으로 일을 하러 가다가 동네 어귀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앞을 지날 때면 가던 길을 멈추고 은행나무를 향하여 두 손을 정성껏 모으고 아이 하나만 점지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내는 텃밭에서 잡초를 뽑다가도 틈만 나면 은행나무쪽을 향하여 애타는 눈빛을 보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올해는 제발 예쁜 아이를 낳게 해주세요.’ 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쉰이 훨씬 넘은 아내의 배가 불러오더니 예쁜 여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부부는 드디어 엄마와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아주 오랫동안 엄마, 아빠와 함께 끝없이 오래오래 함께 살자는 뜻으로 무궁(無窮)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무궁이에게 사내아이의 옷을 입혀 키웠습니다. 깊은 산골마을에 살다보니 여자아이라도 씩씩하고 강하게 키워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바램대로 무궁이는 잘 먹고 잘 자고 정말 순하고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엄마 등에 업혀 하루 종일 텃밭에서 햇볕을 받아도, 아빠 지게에 업혀 온종일 숲속을 돌아다니다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와도 무궁이의 얼굴은 햇볕에 타거나 그을리는 법이 없이 언제나 뽀얗게 하얀 얼굴입니다. 하루하루 쑥쑥 자라는 무궁이가 무거워서 엄마가 업었던 무궁이를 텃밭 한 귀퉁이에 내려놓아도 벌레에 물리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하지 않고 엄마의 밭일이 다 끝날 때까지 방글방글 웃으며 엄마를 기다려주었습니다. 다섯 살 부터는 아빠를 좋아하여 약초를 캐는 아빠를 따라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아빠가 가르쳐준 약초의 모양과 이름을 신기하게 잘 외우더니 산삼과 같은 귀한 약초를 아빠보다 더 빨리 찾는 날도 있어 아빠를 기쁘게 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그날그날의 먹거리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열심히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직 어린 무궁이를 생각하면 엄마와 낮잠도 자고 놀이도 하면서 집에서 생활해야 하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 보니 무궁이를 혼자 집에 둘 수가 없어 엄마, 아빠가 교대로 무궁이를 데리고 밭으로 산으로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궁이가 갓난아기일 때는 사내아이처럼 건강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사내 옷을 입혔지만 늘 엄마, 아빠를 따라 들로 산으로 다니다 보니 치마보다는 바지가 편해 여전히 사내아이의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아빠를 따라 깊고 높은 산을 오르내리다보니 사내아이들처럼 팔다리가 튼튼하고 달리기도 빠르고 날다람쥐처럼 산도 잘 타는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햇볕에 그을려 새까맣게 된 엄마와 아빠와는 달리 무궁이의 얼굴을 언제나 연분홍빛 볼에 뽀얀 이마를 하고 있어 옷차림이나 행동과는 달리 한 송이 꽃처럼 반짝반짝 어여쁜 모습입니다.
이렇게 씩씩하지만 꽃처럼 예쁜 얼굴의 무궁이와 한결같이 무궁이를 사랑하며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는 무궁이네집의 행복을 누군가가 시샘이나 한 것일까요? 무궁이의 엄마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며칠 쉬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엄마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가더니 밥 한 술을 혼자서 드시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아직 일곱 살 밖에 안 된 무궁이가 부엌과 방을 들락거리며 감자 삶은 것, 옥수수 찐 것, 누룽지 끓인 것 등을 엄마에게 드시게 하려고 고사리 손으로 애를 썼지만 엄마는 힘없는 눈빛으로 무궁이를 바라다 볼 뿐 통 드시지를 못하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습니다. 무궁이 아빠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몸에 좋다는 약초는 다 구해서 달여 먹여보았지만 차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무궁이네 집으로 시주를 받으러 왔다가 어려움에 처한 가족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궁이 엄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스님은 무궁이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궁이 엄마는 영양이 많이 부족하니 건강한 아이의 피를 조금 먹으면 금방 일어설 거예요. 나무아비타불.”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은 슬프기만 했습니다. 이 집에서 건강한 아이라면 무궁이 밖에 없는데 아직 일곱 살 밖에 안 된 아이에게 피를 내어 제 어미에게 주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옆에서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궁이는 마치 다 큰 어른처럼 뭔가 생각하는 듯한 의젓하고 깊은 눈빛을 하더니 성큼성큼 텃밭 근처로 가서는 찔레꽃 가시를 하나 잘라내어 자기의 손가락 끝을 꼭 찔렀습니다. 여린 무궁이의 손끝에 찔레꽃 가시가 닿자 빨간 피가 마당에 똑똑 떨어졌습니다. 무궁이는 얼른 한 손으로 피가 나는 손끝을 감싸고 엄마가 누워 있는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 엄마의 입속에 피가 나는 손끝을 밀어 넣었습니다. 엄마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입안에 부드럽고 작은 무궁이의 손가락이 들어오자 무심결에 무궁이의 피를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겨우 한 두 방울의 핏방울을 빨아먹었을 뿐인데 엄마의 눈이 반짝 생기를 찾더니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아빠는 얼른 죽을 쑤어다 무궁이의 엄마에게 먹었습니다. 죽 한 그릇을 다 비운 엄마는 피 묻은 손가락을 잡고 두 눈엔 가득 눈물이 고인 채 빙그레 웃고 있는 무궁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엄마는 두 팔을 벌려 무궁이를 꼭 껴안았습니다. 아빠도 무궁이가 너무 기특하고 대견하여 무궁이의 등을 툭툭 치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다 마당을 바라보니 웬 나무가 보였습니다.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텃밭과 마당사이에 연분홍 꽃이 다닥다닥 달린 초록나무가 일곱 그루나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이상하여 엄마, 무궁이, 아빠 이렇게 온가족이 서로 손을 꼭 잡고 그 초록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그곳은 바로 방금 전에 무궁이가 찔레꽃 가시를 따서 손끝을 찔렀을 때 무궁이가 흘린 핏방울이 떨어진 장소였습니다. 엄마에게 피를 먹일 생각으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꼭 깨물고 힘껏 가시를 찌르는 바람에 땅바닥에 일곱 방울씩이나 핏방울을 흘렸던 것입니다. 무궁이의 엄마, 아빠는 무궁이의 효심 때문에 무궁이의 핏방울에 무궁이의 마음이 담겨져 저렇게 예쁜 일곱 그루의 나무에 연분홍 꽃이 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니 속살은 연분홍빛에 우유처럼 뽀얀 꽃잎, 오똑한 코를 닮은 하얀 수술에 튼튼한 줄기와 싱싱한 잎, 무궁이의 키보다 세배는 되는 나무의 크기까지 무궁이를 꼭 닮아 있었습니다. 나무와 줄기만 보아서는 도저히 저렇게 예쁜 꽃이 필 것 같지 않은 모습이 팔다리는 사내아이처럼 튼튼하면서도 얼굴은 선녀처럼 어여쁜 무궁이와 꼭 한 몸 같았습니다.
이 초록나무는 엄마가 병이 나은지 거의 네 달이 다 되어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 될 때까지 예쁜 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 봉우리를 닫는 단정한 모습, 벌레에게도 지지 않고 덥고 추운 날씨에도 연분홍빛 꽃을 피우는 모습, 무궁이네 텃밭과 마당사이에 작은 울타리처럼 자리 잡아서 마치 무궁이네를 엄마처럼 꼭 품어주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무궁이네 가족의 모습입니다. 엄마와 아빠는 무궁이를 닮은 이 꽃을 무궁이의 꽃, 어리지만 강하고 효심 가득한 무궁이를 닮은 꽃, 그래서 무궁화라고 부르기로 했답니다.
무궁이가 여덟 살이 되던 그 다음해 무궁이 엄마는 떨어진 무궁화 꽃잎을 모아 돌에 빻아서 무궁이의 저고리에 예쁜 꽃물을 들여 주셨습니다. 무궁화 초록 잎은 물에 달여서 초록 물을 뺀 다음 무궁이의 첫 치마에 물을 들였습니다. 엄마, 아빠를 따라 다니느라 늘 바지저고리만 입던 무궁이에게 연분홍 저고리와 초록 치마를 지어 입혔더니 정말 무궁화나무에 무궁화꽃이 핀 것처럼 예뻤습니다. 무궁이처럼 무궁화나무도 아주 튼튼하고 강해서 무궁이가 시집을 가서 무궁이처럼 예쁜 아이를 낳을 때까지 무궁이네 집의 울타리가 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역시 효도는 무궁화 꽃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