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김밭/문인들

[스크랩] 소나기마을 기행(심종은)

길길어멈 2013. 8. 14. 23:15

갯벌원고로 소나기마을 기행문을 보냅니다.,

 

첨부파일 양평기행.hwp

 

 

소나기마을 기행

                                                                                     심 종 은

     황순원님의 작품인 소나기는 교과서에 실려 아직도 은연 중 내 머릿속에 아련히 남겨져       있는 작품이다. 실향민 작가라 있지 않은 고향에 문학관을 건립할 수 없어 아쉬웠던 참에 생전에 길러낸 수많은 문인제자와 교수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던 참에 인문회와 갯벌문학에서 합동으로 이곳 소나기마을로 문학기행을 떠난다는 말에 흔쾌히 동참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아내까지 덩달아 따라 나섰다. 인천시청 정문 앞에서 집결하게 되어 오전 8시에 양평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참석인원은 모두 38명 정도로 버스 1대로 충분하였다. 용문산까지 갈 예정이어서 늘 참석하던 장현기 시인 내외는 몸이 불편한 관계(휠체어)로 이번 기행은 포기했다고 하여 아쉬웠다. 그 바람에 부부동행은 우리뿐이어서 아내가 왜 다들 혼자 다니는 거냐며 볼멘 소리를 냈다.

   시청에서 출발하여 양평으로 가는데, 잠실운동장에서 추가탑승하게 되어 있어서 올림픽도로를 경유하는 바람에 도로체증에 걸려 시간이 많이 소비되었다. 11시를 넘어섰을 무렵에 겨우 소나기마을(황순원문학촌/031-773-2299/서종면 수능리 산 74))에 도착하였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긴 하였으나 미리 섭외하였던 안내자가 문학관 내부를 안내하며 해설을 진행하여 이해가 수월하였다. 소나기마을은 1만 4천평의 부지에 8백평 규모의 3층 문학관을 건립하였는데, 국도군비 로 모두 124억원을 투입하여 2009년 6월13일 개장하였다고 한다.

   해설과 함께 문학관에 기록된 사항을 정렬하면 1915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출생하여 1931.《동광》에 작품 「나의 꿈」, 「아들아 무서워말라」로 등단했고, 1934.『삼사문학』 동인 참가 김동원 이해랑과 가깝게 지냈으며 1936〜1939. 와세다대학교 영문 학사가 되었다.

   양정길 여사와 결혼하고 단편소설 1937년 7월 <창작>에 첫 단편소설 <거리의 副詞(부사)>를 발표했고 대표작으로는 영화화한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가 있다. 말년에는 소설을 발표하지 않았다.

   문학의 거성인 황순원 교수는 함남 출신으로 부유층에서 태어났으며, 공산당의 박해로 남쪽으로 피신해왔다.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지만 서울고에서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기 시작하여 경희대 교수로 24년간 봉직하면서 103편의 시와 103편의 소설을 창작하였다고 전한다.

   황순원 문학의 정수는 바로 영화가 된 『일월 』『신들의 주사위』『움직이는 성』 『별과같이 살다』등 장편소설 7편이다. 『기러기』『곡예사』『학』『잃어버린 사람들』『너와 나만의 시간』『탈』은 단편에 속한다.

   문학관은 대지 16,000평에 건물 800평으로 문화관광부에서 50억, 도에서 24억, 양평군에서 50억 모두 124억 원을 들여 2006년 기공하여 2009년 9월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매일 3회에 걸쳐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소나기체험은 고장이 났는지 도대체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2층 강당에서 여류소설가이기도 한 안영 문학촌장을 만났다. 1965년 황순원 선생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황순원 선생의 제자로 『가슴에 묻은 한 마디』『신사임당』등 자신이 창작한 두편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안영 촌장님은 황순원 선생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황순원 님이 이북 출신이라 남한에 연고가 없었으나, ‘소나기’ 작품 속에 단 하나 <양평>이란 말이 나와 이곳에 문학관을 설립하게 된 배경이라고 했다.

   또 하나, 양평을 거꾸로 하면 평양이 되는데, 황순원 작가님의 고향이 평양이 근처인 함남지방이라고 하는 것이다. 황순원 님은 33인 대표스승 이승훈과 부친 황찬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와 더불어 순수, 절제, 국어사랑을 평생 신조로 하여 사신분이라고 하였다.

   60〜70년대에는 신문에 소설연재를 하면 충분히 먹고 살았는데, 황순원 님은 신문연재 청탁을 단연 거절했다고 한다. 그것은 독자를 위해 흥미위주의 작품을 써야하므로 작품성을 중요시하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라 느껴졌다.

   1957년부터 교수와 작가 외는 전혀 다른 직함을 갖지 않았다. 대학장을 맡으라고 해도 거절하면서, 서거하실 때까지 오로지 작품과 일치하는 삶을 사셨으며, 소주를 좋아하셨지만 한 번도 곤드레만드레 취한 적이 없는 절제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남는다며 문학상도 받지 않으려 하셨으나, 그래도 아시아문학상, 예술원상, 3.1문학상, 인촌문학상 등 수준급 문학상은 모조리 수상하셨다. 또 주례도 잘 서려하지 않고 제자도 선뜻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평소 잠자듯이 가셨다는 선생님. 그런데도 2000년 9월14일에 86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도 되고 주례까지 혜택을 받게 되어 두 번씩이나 선생님의 덕을 받은 촌장님은 그래서 자기는 몹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일제시대 우리글을 못 쓰게 하였을 때도 몰래 한글로 글을 써서 감추어두고 있다가 해방 후에 단편집으로 출간한 고집통이라며, 부유층의 자녀라 6·25 후에 남쪽으로 피난하였다며, 문학촌장이 황순원님의 문학사상을 설득력 있게 말씀해 주셨다.

   그분은 순수와 절제, 그리고 국어사랑에 대한 생활신념을 몸소 실천하는 선각자이자 애국자였음을 강조하셨다. 순수성은 내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해서 은연 중 공감을 갖게 하였다. 국어사랑 또한 얼마나 고귀한 생각인가.

   다만 술을 좋아하면서도 만취한 적이 없을 만큼 자심을 철저히 규제하였다고 나는 절제생활이야말로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과제다. 우리는 술을 필요 이상으로 마시지 않는가. 벌써부터 시간에 쫓기게 되어 두물머리는 그냥 지나치기로 하고 버스로 식당을 향해 이동하였다.

   1시 반경에 남한강변에 있는 식당(양서면 양수리618-4)에 도착하였다. 메뉴는 매운탕. 아내는 여자들끼리 식사한다고 나를 남자들 쪽으로 떼민다. 덕분에 갯벌 원로멤버와 어울렸다. 장현기 회장은 불참했으나 팔순대열의 서운 이준규님과 이귀훈 두 선배님들과 합세했다.

   식사 후에는 20분여 걸리는 들꽃수목원(양평읍 오반리 210-37)으로 향하였다. 입구를 지나 들어서니 완연한 꽃동산이다. 장미와 꽃잔디가 어울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식물원 건물은 2개 동. 그곳을 둘러보고 나왔을 무렵 벌써 약속한 시각에 거의 접근하여 얼른 입구로 나왔다.

   용문사는 포기하고 대신 민물고기생태학습관을 들러 가기로 하였다. 인천도 해양수산자원연구소가 있는데,, 경기도에서는 해양어자원은 물론 내수면까지 함께 관리한다고 했다. 그래서 정식명칭이 경기도해양수산자원연구소(용문면 광탄리 상광길 23-2/031-8008-6523)

   더군다나 이곳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적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도 역시 안내자가 있었다. 여성분이신데 오래 근무해서 그런지 말씀도 잘하신다. 입구에는 은어 떼가 한데 어울려 돌아다니고, 잉어, 향어, 메기를 비롯하여 토종어류가 수족관마다 담겨 있었다.

   러시아 쪽에서 온 철갑상어도 보였고, 미꾸리나 납자루와 같은 토종어종 등 같은 종류의 것이라도 어종이 다양하다는 것을 설명을 통하여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실내만 잇는 것이 아니었다. 실외에도 대형수족장이 있었다. 수십 년 된 잉어와 향어는 물론이고 수염이 없는 초어까지 보았다.

   귀로에 들어섰다. 벌써부터 차량이 밀리는 것이었다. 양평을 벗어나기조차 힘들었다. 서울회원들과 일부 사람들은 중도에서 내려 전철을 타고 개별적으로 귀가하였다. 실제로 그분들이 더 빨리 귀가했다는 연락까지 받았다.

   문제는 귀로에 버스 안에서 소나기마을 방문을 기념하는 소나기 삼행시를 회원들이 즉시 창작하여 시상키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에 한해서 시상하고 모든 작품은 갯벌문예지에 게재토록 하였다. 시상품은 인문회 부회장이 제공한 예술회관 공연관람권과 갯벌회장의 창작시집을 내놓았고, 서부길 상임고문과 내가 심사를 맡았다.

   삼행시의 내용은 작품성도 뛰어나야 하겠지만 위트와 해학에도 상당한 중점을 두었다. 여기서 장원은 손성란 시인, 금상은 유영애 시인, 은상은 함용정 인문회장, 동상은 이준규 서운선생, 장려상은 김영환 청라문학회장이 입상하여 상품을 받게 되었다.

   물론 심사위원인 우리도 작품을 제출하였으나 시상에서는 제외대상이었다. 문학의 외인인 아내는 떨떠름한 모습을 하기에 나는 아내를 구슬러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작품을 제출하였으나 낭송은 하지 않았다.

   끝까지 남은 사람들은 시청 정문앞에 도착한 후 저녁을 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황순원문학촌을 방문하고 분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체험을 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었으나 그래도 봄날에 아내와 함께 나들이 것이나 황순원 님의 문학사상이 가슴속에 온전히 받아들여진 것이 느껴져 행복한 순간이라 창작한 소나기 삼행시를 아내와 함께 다시금 읊조려 본다.

 

      (심 종 은)

     소 : 소나기 마을이 양평에 새롭게 조성되었다는 소문에

     나 : 나도 가고 싶어 모처럼 따라 나섰는데

     기 : 기억 속 또렷이 새겨진 문학의 거성 황순원 님의 생활철학은

           순수, 절제 그리고 국어사랑이어라

 

      (송 옥 희)

     소 : 소리 소문도 없이 내 님이 찾아왔어요

     나 : 나는 반가움에 눈물이 먼저 글썽거렸지만

     기 : 기쁨에 겨워 금세 환성을 질렀어요. 자기 사랑해!.

 

                                                                                                           <끝>

 

 

출처 : 갯벌문학회
글쓴이 : 심정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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